신문은 선생님
[아하! 이 인물] 우리나라 근현대 연극의 큰 스승… 6·25 전쟁 중에도 '햄릿' 공연
입력 : 2016.04.25 04:14
탄생 100주기 故 이해랑 선생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명연극 '햄릿'은 현재까지 한국인에게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즐길 수 있는 까닭은 역사의 격동기에 어려운 제반 환경 속에서도 우리나라 근현대 연극의 기초를 세우신 분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오늘의 인물은 탄생 100주기를 맞아 더욱 의미가 있는 한국 연극계의 큰 스승, 고(故) 이해랑 선생님입니다.
1916년, 이해랑은 매우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고조부께서는 조선 철종 임금의 사촌이었고, 할아버지는 왕실의 의전실장, 아버지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의 의사였다고 해요. 청년 시절 이해랑은 휘문고보에 입학하자마자 항일 동맹휴학의 주동자로 몰려 퇴학당할 정도로 강단 있고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학생이었고요.
셰익스피어의 명연극 '햄릿'은 현재까지 한국인에게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즐길 수 있는 까닭은 역사의 격동기에 어려운 제반 환경 속에서도 우리나라 근현대 연극의 기초를 세우신 분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오늘의 인물은 탄생 100주기를 맞아 더욱 의미가 있는 한국 연극계의 큰 스승, 고(故) 이해랑 선생님입니다.
1916년, 이해랑은 매우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고조부께서는 조선 철종 임금의 사촌이었고, 할아버지는 왕실의 의전실장, 아버지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의 의사였다고 해요. 청년 시절 이해랑은 휘문고보에 입학하자마자 항일 동맹휴학의 주동자로 몰려 퇴학당할 정도로 강단 있고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학생이었고요.
- ▲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이해랑(앞줄 왼쪽에서 셋째) 선생님이 햄릿 공연을 한 뒤 동료 배우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에요. 뒷줄 스태프들은 군복을 입고 있어 전쟁 중이라는 것을 실감 나게 하지요. /대한민국예술원 제공
이해랑은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 그리고 분단이라는 역사적 혼란기 속에서 연극의 정통성을 지키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어요. 6·25 전쟁의 피란지에서도 연극 무대를 만들어 피란민들을 위로하고, 일반 대중에게 연극을 널리 전파하는 데 기여했어요. 무언가 보람 있는 일 한 가지에 심취해서 신념을 가지고 일평생 한 우물을 파면서 살아가는 삶, 이런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이해랑은 연기자인 동시에 뛰어난 연출가로서 '햄릿'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황금연못' 등 희곡 100여 편을 무대에 올렸으며, 해방과 함께 극단 '전선'을 창립하고 1946년에는 '극예술회'를 설립하는 등 독립 후 혼란한 시기에도 연극계를 주도했어요. 문화예술기관을 세우고 정착시키는 문화예술행정가로서도 활동하며, 국립극장의 극장장과 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 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했죠. 선생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해랑연극재단과 조선일보는 매년 우리나라 최고의 연극인에게 이해랑 선생님의 이름을 딴 '이해랑 연극상'을 수여해 오고 있답니다.
이해랑은 거장임에도 스스로 악역을 도맡아 하는 배우로 유명했답니다. 한번은 이해랑이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악역 '이아고'로 출연할 때였어요. '이아고'로 분장한 그가 악역 연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관객석에서 새총을 쏴 오른쪽 뺨을 때렸어요. 잠시 후 또다시 돌팔매가 날아와 곤욕을 치렀죠. 나중에 범인을 잡고 보니 꼬마 관객이었어요. 이해랑의 연기가 너무 실감 나자, 아이가 '이아고'가 밉다며 저지른 일이었어요.
이해랑은 이런 말을 남겼어요. "연극은 종합예술이야. 연극엔 문학도 있고, 시각 장치는 물론 음향 같은 청각적인 요소도 있어. 또 살아 있는 율동과 액션의 무용적인 면이 포함되어 있거든. 그뿐인가? 생생하게 현장에서 하는 예술로 관객이 함께 숨 쉬고 있어. 그래서 이 어려운 연극에 한번 빠지면 못 벗어나는 거지."
'모든 예술 분야가 녹아든 종합예술 연극은 그 나라 문화의 표본이다'고 해요. 이해랑 선생님의 연극 한평생은 어쩌면 연극을 통한 나라 사랑의 원대한 큰 뜻이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