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클래식 따라잡기] 악보 외우는 전통… 작곡가를 사랑하는 과정이래요

입력 : 2016.04.08 03:09

[암보의 원리]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리스트… 작곡가 영감 파악하려 암보 시작
전체 줄거리를 이해하며 외우고 두 번, 세 번 반복해야 쉽게 외워요

무대에서 악보 없이 공연하는 것은 피아니스트들에게 약 170년이나 이어진 전통이에요. 덕분에 모든 피아니스트가 어려서부터 악보를 외우는 일에 익숙해져 있어요. 음악학교에서는 자신의 전공 악기 연주를 선생님 앞에서 들려주고 점수를 받는 실기 시험을 보는데, 이때도 악보를 외우는 것은 대개 필수 사항이지요. 시험 기간이 되기 얼마 전부터 음대생들끼리 인사는 으레 "악보 다 외웠니?"가 될 정도예요. 악보를 보지 않고 긴장 상태에서 연주를 하는 일은 연주자들에게 일상이 되었어요.

그런데 표현력과 감성이 중요한 음악에서 악보를 반드시 외워서 연주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요? 악보를 외우는 데 들이는 노력이 관객이 듣는 연주 실력과 반드시 직결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그 노력을 아껴서 표현력을 배가시키는 데에 쓴다면 더 나은 연주가 나오지 않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곡을 더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악보를 외우는 것이랍니다. 오늘은 악보를 처음 외워 연주하기 시작한 피아니스트는 누구였는지, 피아니스트들이 길고 긴 악보를 외우는 비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 드릴게요.

작곡가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외워요

피아노 음악사에서 암보(暗譜·악보를 외워 기억함)를 시작한 피아니스트는 19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와 클라라 슈만으로 알려져 있어요.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클라라 슈만은 1837년, 리스트는 1841년부터 암보를 시작했다고 해요. 두 사람은 "악보를 외우면 작품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고, 작곡가의 영감(靈感·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을 더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답니다. 한마디로 암보를 하면 더 잘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작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조성진이 악보를 외운 상태로 까다로운 쇼팽의 곡을 연주하고 있어요. 조성진을 비롯한 피아니스트들이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는 이유는 작곡가의 생각에 자유롭게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에요.
작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조성진이 악보를 외운 상태로 까다로운 쇼팽의 곡을 연주하고 있어요. 조성진을 비롯한 피아니스트들이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는 이유는 작곡가의 생각에 자유롭게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에요. /쇼팽 콩쿠르 2015 제공
당시 클라라와 리스트가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연주자였다는 사실이 재미있어요. 직접 작곡한 '초절 기교 연습곡'으로 유명한 리스트는 무대에서 자신의 실력을 뽐내길 좋아했고, 청중을 의식하는 피아니스트였어요. 리스트는 쇼맨십(showmanship·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그들을 즐겁게 하는 재능)이 강하고 워낙 무대 매너가 화려한 것으로 유명했는데요, 암보를 처음 시작한 그날, 청중을 향해 가지고 나온 악보를 휙 던지면서 연주를 시작했어요. 청중은 당시만 해도 리스트나 클라라 슈만이 악보를 외워서 치는 것을 작곡가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는 이유로 싫어하거나 낯설어 했어요.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이자 명연주자였던 클라라 슈만은 내면에 충실하고 진지한 철학이 있는 연주를 했어요. 클라라는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외워서 연주한 뒤, "작곡가의 생각에 좀 더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었다"고 했대요. 그 후 클라라와 리스트를 따라 후배 피아니스트들도 악보를 외워서 치게 되었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작곡가를 이해하고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됐죠.

다만 예외적으로 너무 긴 곡을 연주할 때 나, 70~80대 피아니스트가 예전에 친 곡을 다시 공연하는 경우에 기억력이 청년 시절에 비해 한결같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악보를 보기도 하지요.

전체 구도부터 파악하면 잘 외울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악보를 잘 외울 수 있을까요? 지도를 볼 때를 떠올려보세요. 전국 지도는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지형을 파악하기 좋지만 세세한 건물이나 골목은 보이지 않죠? 확대해서 좀 더 좁은 지역이 표시된 지도를 보면 비로소 세밀한 내용을 알 수 있죠. 먼저 전국 지도를 보고, 그다음 지역 지도를 봐야 어떤 곳의 위치가 완전히 이해되는 것처럼, 악보를 외울 때에도 우선 작품의 전체적인 모양과 친숙해진 뒤 점차 구석구석을 알아가는 방식으로 외워야 해요.

또 한 가지 예시를 들어볼게요. 올해 나온 신작 소설과 춘향전 중 외우기 쉬운 소설을 고르라면, 단연 춘향전 쪽이 외우기 쉬워요. 우리가 대강의 줄거리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중요한 사건이 언제 나타나고, 주인공이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지 알고 있으니 작은 에피소드를 외우기 훨씬 쉽지요. 음악도 문학처럼 대개는 일정한 스토리가 있어요. 그래서 작품 전체의 기둥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이 악보를 외울 때 가장 중요해요.

피아노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무엇보다 피해야 할 것은 동서남북의 방향이나 전체 구도를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외우는 거예요. 10페이지짜리 곡을 외울 때 "이번 주는 앞의 5페이지, 그다음 주는 뒤의 5페이지를 외우겠어요"라고 하는 학생들도 있어요. 전체 줄거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개 시간이 지나면 앞부분을 잊어버리게 되지요.

요약하자면, 반드시 전체 악보를 한 번 외우고, 두 번째 보고, 또다시 보는 방식으로 외워야 한다는 거예요. 중간에 기억이 안 나는 부분을 못 치고 넘어가도 괜찮아요. 하지만 앞부분은 깨알같이 기억해서 칠 수 있으면서 뒷부분을 하나도 못 친다는 건'작곡가의 영감을 이해한다'는 암보의 원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결국 악보를 외운다는 것은 단순히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함께 그것을 만든 작곡가를 깊이 알아가고 사랑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 방법은 악보를 외우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아요. 어떤 분야든 자신이 잘 알아야 하는 내용을 더 친숙하게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공부의 결과는 반드시 멋지게 나타날 거예요.

김주영 피아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