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아하! 이 인물] 문화재 日에 넘어가는 것 막아… 훈민정음해례본 등 국보 12개 지켜냈어요
입력 : 2016.03.28 03:09
문화독립운동가 전형필
최근 일제에 의해 허락 없이 빼돌려져 80년간 일본인 개인 저택의 정원 장식물로 전락했던 고려 초기 3층 석탑이 우여곡절 끝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왔답니다. 한 민간 문화재 환수 단체에 따르면 일본으로 불법 반출된 문화재만 30만점 이상이라고 해요.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전 재산을 바쳐 문화재를 지켜낸 문화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바로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십니다. 국보 제70호 훈민정음해례본, 국보 제135호 신윤복의 미인도,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한국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떠올릴 수 있는 문화재를 한평생 동안 지켜내셨지요.
전형필은 1906년 서울에서 손꼽히는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물려받은 논만 4만 마지기(약 800만평)였고, 1년에 거둬들이는 쌀은 당시 기와집 150채를 사고도 남는 정도였다니 어마어마한 부자였던 것이지요. 그는 이 엄청난 재산을 문화재를 지키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두 쏟아부었어요.
전형필은 1906년 서울에서 손꼽히는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물려받은 논만 4만 마지기(약 800만평)였고, 1년에 거둬들이는 쌀은 당시 기와집 150채를 사고도 남는 정도였다니 어마어마한 부자였던 것이지요. 그는 이 엄청난 재산을 문화재를 지키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두 쏟아부었어요.
- ▲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 자신이 보호한 도자기 문화재 앞에서 미소 짓고 있어요. 전형필 선생님은 훈민정음해례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사진 왼쪽에서 둘째 청자) 등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일본에 반출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했어요. /조선일보DB
유네스코 세계 기록문화유산이기도 한 훈민정음의 원본, 훈민정음해례본에 얽힌 일화도 있어요. 훈민정음해례본은 연산군 때 대부분 불태워 없어져서 매우 귀했는데, 원래 소장자는 이 책을 기와집 한 채 값에 팔려고 했지요. 그런데 간송 선생님은 '이런 보물 중의 보물을 한 채 값만 줄 수 없다'면서 기와집 열 채 값을 주시고 수고비로 한 채 값을 더 얹어 주셨다고 합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전형필 선생님은 조선어학회 33인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葆華閣·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으로 불러 모아 훈민정음해례본을 공개했어요. 그리고 영인본(원본을 복제한 인쇄물)을 만들 수 있도록 귀중한 원본을 낱장으로 떼어 흔쾌히 제공했지요. 그 후 6·25전쟁 때에는 훈민정음해례본을 넣은 가방을 가슴에 품고 다니셨고, 밤에는 베개 속에 넣고 주무셨다고 합니다.
- ▲ 훈민정음해례본. /간송미술관
어느 날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서예가 위창 오세창 선생이 전형필에게 왜 서화나 골동품 수집에 나섰느냐고 물었을 때 전형필은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해요. "'서화 전적(書畵典籍·글씨, 그림, 책, 문서)'과 골동은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형필 선생과 같은 분이 안 계셔 일제 치하에서 혼이 담긴 귀중한 문화재가 다 없어져 버렸다면 문화 없는 민족이란 오명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지 않나요?
정부도 2012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설립하고 뒤늦게나마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조사·연구와 환수에 나섰어요.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되찾는 일은 제2의 독립운동이자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극복하는 극일 운동이니, 국민 모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