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서유럽 통합 '유럽의 아버지'… 크리스마스에 서로마제국 황제 되다

입력 : 2015.12.24 03:07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

내일은 크리스마스입니다. 서기 800년 12월 25일은 유럽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크리스마스 날이었답니다.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에게 보석이 가득 박힌 왕관을 씌우며 '서로마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 카롤루스'라고 선포한 대관식이 있었거든요.

'카롤루스'는 그를 생전에 부르던 라틴어 이름으로 프랑스에서는 같은 사람을 샤를마뉴 대제로, 독일에서는 카를 대제라고도 부르지요. 그런데 카롤루스 대제는 게르만족이랍니다. 395년 고대 로마제국은 동서로 쪼개졌는데,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에게 시달리다 476년 멸망했어요. 그런데 그로부터 300여 년 후, 게르만족 출신 왕이 새로 세워진 서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거예요. 교황 레오 3세와 카롤루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뚜렷한 이목구비·큰 키 등 게르만족의 특징을 보이는 카롤루스 대제에게 교황 레오 3세가 서로마제국 황제 관을 씌워주는 장면을 그렸어요.
뚜렷한 이목구비·큰 키 등 게르만족의 특징을 보이는 카롤루스 대제에게 교황 레오 3세가 서로마제국 황제 관을 씌워주는 장면을 그렸어요. /Corbis 토픽이미지
7세기 무렵 강대국이었던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은 190㎝의 큰 키, 뚜렷한 이목구비, 짧지만 다부진 목을 지닌 게르만 전사 모습 그대로였죠. 그는 평생 말 위에 앉아 반란을 진압했고, 재위 기간 영토를 2배로 넓혔어요. 전투를 많이 벌인 그는 수많은 군사와 전쟁 비용이 필요했는데, 게르만족 전통대로 유력한 세력을 기사로 임명해서 정복한 지역 땅을 나누어줬어요. 땅을 받은 기사는 전쟁이 났을 때 말과 시종을 거느리고 카롤루스와 함께 싸우며 충성을 바쳤지요. 이 제도는 후에 중세 유럽의 상징인 봉건제도로 자리 잡기도 하지요.

열정적 크리스트교 신자였던 카롤루스는 정복한 지역마다 교회를 세우고, 크리스트교 개종을 강요했어요. 그래서 서유럽에 살던 게르만족 대부분은 크리스트교를 믿게 되었지요. 프랑크 왕국의 수도 아헨에는 궁정 학교가 세워지고, 로마 문화의 부활을 알리는 고전이 수집·연구되었어요. 덕분에 게르만의 전통과 크리스트교 문화, 로마 문화가 섞여 하나로 융합되었어요. 하지만 부족함을 느낀 카롤루스 대제는 제국 통합을 위해 더 차원 높은 권위가 필요했어요.

이때 카롤루스의 세력이 점점 막강해지는 것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교황 레오 3세였어요. 그는 비잔티움(동로마제국) 황제와 성상 숭배 금지령을 두고 갈등하고 있었지요. 카롤루스 같은 왕도 문자를 모를 정도로 문맹이 흔한 게르만족에게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성경 인물을 조각으로 만들거나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해야 하는데, 비잔티움 황제는 그것을 금지하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교황 레오 3세는 서유럽 교회를 보호해줄 강력한 힘이 필요했어요. 로마 인근에 있는 롬바르디아 왕국으로부터 수시로 공격을 받고 있었고, 이미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한 이슬람 세력 역시 고민거리였죠.

서로마제국 황제 카롤루스의 대관식은 레오 3세와 카롤루스의 필요가 만나 이루어졌어요. 교황은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를 얻었고, 카롤루스는 옛 로마제국의 전통과 권위를 얻었어요. 이럴 때 가장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아마도 '누이 좋고 매부 좋고'겠죠! 그날 이후로 서유럽 여러 나라 문화는 서로마제국의 전통을 공유하며 서로 다른 듯 닮아 이어져 오고 있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서유럽을 통합한 카롤루스 대제를 최초의 유럽인, 유럽의 아버지로 부르고 있어요. 카롤루스 대제의 칼은 게르만 전통을, 십자가는 크리스트교를, 왕관은 로마 문화를 상징해요. 이것이 서유럽 문화권의 기본 요소가 되었죠.

공미라 세계사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