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진흙 판에 쐐기 문자로 기록한 '종교의 자유'

입력 : 2015.12.10 03:08

최초 인권선언문 '키루스 실린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평등을 아우르는 인권(Human Rights)은 근대 시민혁명 이후 인류가 추구한 가장 소중한 가치였어요. 1948년 12월 10일 UN에서 온 인류에게 세계 인권 선언을 선포했지만, 67년이 지난 지금도 인권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요. 그런데 인권이라는 말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 고대국가에서도 인권이 존재했을까요?

메소포타미아문명에서 출발한 서아시아 지역은 약육강식의 무대였어요. 크고 작은 민족의 흥망성쇠가 반복되었지요. 기원전 7세기 무렵 철제 무기를 앞세워 통일 국가를 이룬 아시리아는 잔혹한 군사 통치로 사람들의 원성을 샀어요. 이민족을 강제 이주시켜 노예로 삼고, 지나치게 엄격한 형벌로 다스렸거든요. 강압적인 지배는 결국 반란의 씨앗이 되었고, 아시리아는 통일 100년을 못 넘기고 멸망하고 말았어요.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2세(오른쪽)는 종교의 자유와 이민족에 대한 관용을 키루스 실린더(왼쪽)에 기록하게 했어요.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2세(오른쪽)는 종교의 자유와 이민족에 대한 관용을 키루스 실린더(왼쪽)에 기록하게 했어요. /위키피디아
그 후 기원전 6세기 이란의 파르스고원에 키루스 2세가 등장해요. 그가 거느린 부족을 '파르스고원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페르시안'이라고 불렀죠. 키루스 2세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어요. 강대국 리디아와 싸울 때는 낙타를 이용해 리디아 병사들이 탄 말들이 놀라 도망하게 만들었고, 필요하다면 이웃 나라와 손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가 빈부 격차와 종교 분열로 사회 갈등이 심각해진 틈을 타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정복하기도 했고요. 지금의 터키·이스라엘·시리아·이란 지역을 차지한 키루스 2세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를 열었답니다.

키루스 2세의 위대함은 인간적인 통치 방법에 있었어요. 성경의 에스라서에 따르면 그는 칙령을 내려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고 해요. 그는 언어와 종교를 강요하지 않고, 각 민족의 제도와 관습을 최대한 활용하는 정책을 폈어요.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200여 년간 번영을 누렸지요.

키루스 2세의 업적이 재조명된 것은 1879년 이라크의 바빌론 고대 신전 벽 속에서 길이 23㎝, 지름 10㎝의 원통형 고대 문서가 출토된 덕분이에요. 진흙 판 겉면에 뾰족한 갈대로 쐐기 문자를 찍어서 만든 '키루스 실린더'였지요. 쐐기 문자를 해독했더니 '바빌로니아 주민의 생계를 향상시킨다. 제국 내 여러 민족에게 종교의 자유를 준다. 포로로 끌려온 여러 민족과 그들의 신상(神像·신의 모습을 표현한 조각상)은 본국으로 돌려보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어요. 정복당한 민족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내용이 증명된 거죠.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키루스 실린더를 '완벽하지는 않지만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이라고 평가해요. 반면 우여곡절 끝에 오스만제국으로부터 키루스 실린더를 획득해 소장한 영국에서는 '왕으로 즉위하면 관용을 베푸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해요. 영국은 이란의 끊임없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키루스 실린더의 반환을 거부하고 있지요. 이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키루스 2세의 관용 정신은 25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현대에도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에요. 키루스 실린더에 담긴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바로 인권 실현의 시작이니까요.

공미라 세계사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