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명옥의 명작 따라잡기] 느껴지나요… 화폭에 스며든 '그녀'

입력 : 2015.10.30 03:09

꽃·여인으로 사라지는 아름다움 그림에 담아
꽃뱀으로 머리 장식한 '천 화백'의 22세 자화상
그녀 내면의 이중적인 감정, 화폭에 표현했어요

한국의 대표적 여성 예술가인 고(故)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6일 미국에서 91세로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어요. 미술계는 큰 별을 잃었다며 슬퍼하고 있어요.

천 화백은 채색화 전통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화가로 유명해요. 특히 천경자표 화풍으로 불리는 아름답고 화려한 여인상은 큰 사랑을 받고 있답니다. 천 화백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공통점이 있는데요, 한 사람의 얼굴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해요.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모델로 삼은 인물은 누구인지 함께 살펴볼까요.

◇꽃과 여인을 즐겨 그린 이유는

작품 1에선 여인이 꽃동산에서 꺾은 꽃들을 품 안에 가득 안고 서 있군요. 여인의 주변에도 눈부시도록 화려한 꽃들이 활짝 피어났네요. 이 그림은 천경자표 여인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여인과 꽃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장식하지요. 천 화백이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여인상을 즐겨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꽃은 흔히 아름다운 모양과 고운 색깔, 달콤한 향기를 지녀 아름다운 여성으로 비유되곤 해요. 꽃과 여인은 생명의 아름다움과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상징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름다움도 행복도 영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덧없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것들을 그림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게 한 것이지요.

작품1 사진
작품1 - 천경자, 꽃다발을 안은 여인, 1981.

한편, 꽃은 색채를 실험하는 도구이자 현실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는 존재이기도 했어요. 이는 천 화백이 "꽃은 그 자체가 색채의 화려한 파티이자 내 작품 세계로 이끌어주는 환상의 터전이며 안식처다"고 말한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답니다.

◇긴 머리카락과 목, 그리고 황금빛 눈동자

작품 2작품 3에 나오는 두 여인을 보세요. 둘 다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과 긴 목을 가졌어요. 천 화백은 왜 긴 머리와 긴 목을 가진 여인상을 그렸을까요?

작품2, 3, 4 사진
작품2 - 천경자, 황금의 비, 1982 / 작품3 - 천경자, 길례 언니, 1982 / 작품4 - 천경자, 막은 내리고, 1989.

여인의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여성만이 가진 특별한 아름다움을 뜻해요. 즉 자신에 대한 사랑과 여성으로서 자부심을 의미해요. 그런 이유로 여성 예술가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도구로 긴 머리카락을 활용해 작품을 만들기도 하지요. 그런가 하면 긴 목은 내면의 고독과 높은 품격을 의미해요.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시인 노천명의 '사슴'에는 이런 구절이 나와요.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천 화백은 예술가는 숙명적으로 고독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예술가의 꿈을 실현하려면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믿었어요. 여인의 유난히 긴 머리카락과 긴 목은 고귀한 존재가 되기를 꿈꾸며 스스로 고독한 삶을 선택한 예술가의 심정이 담겨 있답니다.

이번에는 작품 4에 나오는 여인의 눈을 살펴보세요. 노란 화관을 쓰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은 남태평양 타히티 섬 원주민입니다. 두 여인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인데 눈동자는 황금색이네요.

천 화백의 그림에 등장한 여인은 대부분 진한 눈화장을 한 데다 황금빛 눈동자를 가졌어요. 천 화백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나는 여인의 눈동자에 진짜 금칠을 한다. 금가루를 섞어 노란 눈동자를 그리면 더욱 강렬한 빛을 내면서 슬퍼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처럼 황금색 눈동자는 여인들을 조용하고도 외롭게 보이게 하네요.

끝으로 천 화백의 여인상에 등장한 여인들은 얼굴이 닮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많은 여인을 그렸지만 결국 한 사람의 얼굴을 그렸다는 뜻이지요. 그 한 사람은 천 화백을 말하는 거고요.

작품5 사진
작품5 -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그 근거로 작품 5를 보세요. 천 화백이 53세 때 자신의 22세 때를 되돌아보며 그린 자화상이에요. 앞서 감상한 작품들의 주인공과 많이 닮지 않았나요? 꽃뱀으로 머리를 장식한 점만 다르지요. 알록달록한 빛깔을 가진 꽃뱀은 그녀의 자아를 상징해요. 여기서 꽃뱀은 이중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특이한 존재예요. 우리는 뱀의 아름다운 무늬에 매혹당하면서도, 징그러운 뱀이라는 혐오스러운 감정을 떨쳐 버리지 못하니까요. 천 화백이 강렬한 유혹의 대상이면서 증오의 대상이기도 한 꽃뱀을 자신에 비유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런 자신이 싫고 미워지는 순간이 우리에게 가끔 찾아오기도 하니까요.

러시아 소설가 톨스토이는 "예술은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그들이 자신과 동일한 감정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천 화백의 여인상이 감동을 주는 것은 그녀 자신의 감정을 우리도 함께 느낄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지요.



이명옥·사비나 미술관 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