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일본군에 희생된 30만명… 그 아픈 기록 알고 있나요

입력 : 2015.10.29 03:08

난징대학살

중국의 난징대학살 관련 기록이 최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어요. 난징대학살이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에 중국 난징을 점령하고 수십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한 사건을 말해요.

일본 정부는 난징대학살 관련 기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유네스코에 유감이라고 밝혔어요. 그뿐만 아니라 유네스코에 지원해온 돈을 더 이상 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압박하고 있지요.

반면 중국은 12월 13일을 난징대학살 희생자 추모일로 정하고, 대학살 장소엔 세계기록유산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어요. 역사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외교 갈등이 커지고 있는데요. 1937년 난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1937년 중국 난징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된 중국인 시신들을 한 일본군이 바라보고 있어요.
1937년 중국 난징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된 중국인 시신들을 한 일본군이 바라보고 있어요. /바이두
난징대학살을 설명하기 위해 중일전쟁(1937~1945)이 왜 일어났는지부터 살펴볼게요. 베이징에서 멀지 않은 루거우차오 다리 부근에는 마쓰이 이와네가 이끄는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었어요. 당시 중국의 반(反)제국주의 농민 투쟁인 '의화단 사건'이 실패한 후 각국의 군대가 중국에 들어와 있었거든요. 1937년 7월 7일, 여름밤의 정적을 깨고 여러 발의 총소리가 들렸어요. 지금까지도 누가 어떤 이유로 총을 쏘았는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일본군은 중국에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며 루거우차오 다리를 점령해 버렸어요.

이후 일본군은 베이징과 톈진에 이어 상하이까지 공격했어요. 중일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답니다. 당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다투던 때였어요. 일본에 맞서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 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힘을 합해 일본군에 저항했어요. 처음에 일본은 3개월이면 승리할 줄 알았는데 중국의 저항이 예상보다 강해 전쟁이 지루하게 계속되었지요.

난징의 운명은 국민당이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기면서 달라졌어요.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부터 이듬해 1월까지 40여 일간 일본군의 잔혹한 살상이 이어졌지요. 도시는 연기에 휩싸였고, 사람들은 무차별 학살됐어요. 생매장을 당한 사람도 있었고, 여자와 아기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목 베기 시합을 하는 일본 군인들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어요. 이번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기록유산 중에는 무릎 꿇은 중국인의 목을 단칼에 베는 사진도 있어요.

아비규환의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한 줄기 빛은 독일 기업인 욘 라베, 미국인 선교사 미니 보트린 등 외국인이었어요. 이들은 외국대사관과 난징대학교를 중심으로 안전구역을 만들고 중국인들에게 숨을 장소와 음식을 제공했어요. 욘 라베는 자기 재산을 털어 650명이 넘는 중국인을 보호했어요. 제2차 세계대전 때 오스카 쉰들러가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구했던 것처럼 욘 라베는 난징에서 중국인들을 구해낸 거예요.

중국이 공개한 1947년 난징시 군사법정 판결문에 따르면, 난징대학살 당시 30만명 이상이 살해됐다고 해요. 12초에 한 명 꼴로 억울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셈인데요. 일본은 이 자료의 사실 여부를 따지며 중국과 대립하고 있어요.

얼마 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된 경위를 조사하라고 지시했어요.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한 준비라고 해요. 우리나라와 일본은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기록과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록의 유네스코 등재를 놓고 갈등 중이에요. 난징대학살 관련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이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이유랍니다. 중국과 일본이 양국의 역사 갈등을 어떻게 풀어가는지도 눈여겨봐야겠지요?

공미라 세계사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