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책으로 보는 세상] 할머니 죽음 앞, 가족의 진짜 속마음은?

입력 : 2015.09.23 03:09

[85] 현진건 '할머니의 죽음'

할머니 병환 위독 전보 받지만 슬퍼하기보단 의무로 여기는 가족
임종 늦어져 곁 지키던 가족 떠난 뒤 외롭게 죽음 맞이하는 '나'의 할머니
노인 향한 공경·孝, 사회 변해도 변하지 않는 당연한 덕목이에요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로 불리는 작가 현진건 사진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로 불리는 작가 현진건.

어느 설문 조사 기관에서 수도권에 사는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로는 우리 사회에서 노인이 존경받는다는 의견은 6% 남짓에 불과했어요. 그러나 과거 공동체 사회에서 노인은 연륜을 지닌 지혜롭고 현명한 '어른'으로 여겨졌어요. 노인 공경과 효(孝)는 사람이라면 지녀야 할 당연한 덕목이었지요. 그러나 사회가 변화하면서 노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노인은 신체 능력이 떨어지고 무기력하며 누군가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 귀찮은 존재로 보는 사람도 생긴 것이죠. 할머니의 죽음을 바라보는 가족의 이기적인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단면을 잘 그려낸 '할머니의 죽음'은 현진건(1900~1943)의 단편소설이에요. 김동인·염상섭과 더불어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라 불리는 현진건은 '빈처' '술 권하는 사회''운수 좋은 날''B사감과 러브레터' 등 많은 단편소설을 남겼지요.

'할머니의 죽음'은 '조모주(할머니) 병환 위독'이라는 내용의 전보를 받았어도 '나'가 별로 놀라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요. 이유인즉 벌써 여든둘이 넘은 할머니는 작년 봄부터 시름시름 앓아 자손들을 몇 번 소집하게 했기 때문이죠.

"지금 돌아가시면 호상(好喪)이지. 아드님이 백발이 허연데…."라고 양모(양어머니)도 맞방망이를 치며 눈을 멍하게 뜬다. '나'도 과연 그렇기도 하겠다 싶었다.

좋을 호(好). 죽을 상(喪). 우리는 특별한 병 없이 오래 산 노인의 죽음을 가리켜 호상이라고 해요. 보통 상갓집에 가서 상주를 위로할 때 쓰는 말이며 별 뜻 없이 무미건조하게 읊조리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과연 이 세상에 호상이 있을까요? 물론 할머니의 죽음을 호상이라 여기는 이면에는 그가 여든두 살이나 되도록 살았고 자손을 많이 둔 까닭도 있겠지만, 모두 죽음을 앞둔 당사자인 할머니의 심정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 면이 있죠.

그래도 돌아가시지는 않았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생가를 찾은 '나'는 그곳에서 상청(喪廳)을 발견해요. 상청은 죽은 사람의 영궤와 그에 딸린 것들을 함께 차려 놓는 곳을 말해요. 초상이 난 후에 짓는 것이 도이지만, 가족들은 할머니의 죽음이 곧 닥치리라 단정 짓고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에요. 전보를 보내면 한걸음에 달려오는 자손들이건만 어쩐지 이들의 효행이 그리 진실해 보이지는 않아요. 할머니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한다기보다는 빨리 해치워야 하는 의무쯤으로 여기는 것이지요.

중모(작은어머니)만은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불교의 독신자인 그는 잠 오는 눈을 비비기도 하고 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기도 하면서 밤새도록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 (중략) "할머니 병환이 이렇듯 위중하신데 너희는 태평치고 잠을 잔단 말이냐. (중략) 다들 뭐란 말이냐. 나는 한 달이나 밤을 새웠다. 며칠들이나 된다고." 졸음 오는 눈을 비비는 우리를 보고 그는 자랑스럽게 또 이런 꾸중도 하였다.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이병익

'나'는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하게 할머니를 돌보는 중모의 효심에 놀랐어요. 그리고 중모는 이러한 자신의 효성을 근거로 야단쳤기 때문에 '나'는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나'는 중모가 진심으로 할머니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자신이 효도하고 있다고 남들에게 생색내고 싶어 하는, 자신이 얼마나 할머니를 위해 헌신했는지 과시하고 싶을 뿐이지요. 병환이 위독해 금방이라도 돌아가실 것 같은 할머니가 예상 외로 돌아가시지 않자, 가족들은 회사 일 등 개인적 사정 때문에 곤란해 해요.

그들은 하나도 한가한 이가 없었다. 혹은 변호사, 혹은 은행원, 혹은 회사원으로 다 무한정하고 있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암만해도 내일은 좀 가 봐야 되겠는데. 나는 전보를 보고 벌써 돌아가신 줄 알았어." 그중에 제일 연장자로 쾌활하고 말 잘하는 백형은 웃음 섞어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암만해도 오늘내일 돌아가실 것 같지는 않은데…. 이거 큰일 났는걸. 가는 수도 없고…."

결국 가족들은 제각기 흩어졌고, '나'도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러던 어느 아름다운 봄날, '오전 3시 조모주 별세.'라는 내용의 전보를 받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나요. 다른 가족들이 즐거워하고 있을 봄날, 홀로 죽음을 맞이했을 할머니의 외로운 모습이 더욱 부각되며 씁쓸함을 자아내죠.



#이야기

세계 많은 나라에서 노인들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노인들을 돌봐주는 로봇이 개발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실벗'과 '메로'라는 로봇이 개발되어 노인들의 두뇌 훈련을 도와 치매를 예방하는 것은 물론 감정을 표현하고 자연스러운 대화도 나눌 수 있다고 해요. 이처럼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의 관심과 사랑은 노인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한계도 있을 것이에요. 소설 속에서 가족들은 할머니의 존재를 귀찮아해요. 가족들은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려고 모인 것이라기보다는 할머니의 죽음이 빨리 결정되어 장례라는 자신의 도리를 마치고 싶어 하지요. 그런데 할머니가 있기에 부모가 있는 것이며 또 그 자녀인 우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로봇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마음 아닐까요?

[함께 생각해봐요]

여러분은 ‘노인’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주위 친구들과 이야기해 보세요.

양미연·한우리독서토론논술 선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