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책으로 보는 세상] 36년 독립운동… '건국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기틀 마련
[82] 건국 대통령 이승만
고종 황제 쿠데타 혐의로 옥살이… '독립정신' 책 쓰며 나라 미래 걱정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일본의 미국 공격 경고하기도
한반도 신탁통치에 가장 먼저 반대… 정부 수립 후, 초대 국회서 대통령으로
- ▲ 이승만이 감옥 안에서 대한제국의 운명을 한탄하며 쓴 ‘독립정신’(왼쪽).‘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 표지.
오늘날 우리가 광복절로 기리는 8월 15일은 대한민국 건국의 날이기도 합니다. 해방된 지 꼭 3년 뒤인 1948년 이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죠. 그리고 정부 수립과 더불어 항일 민족 지도자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여러분과 같은 어린이, 학생이었을 때 그리고 나라를 세우기 전까지 과정은 어떠했을지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기파랑)'를 책과 사진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문명의 전환기에 태어나다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어머니는 교육을 위해 황해도에서 서울로 이사 가도록 남편을 설득할 정도로 총명했던 아들에 대한 교육열 또한 높았다고 해요. 이승만은 어머니의 희망에 따라 열세 살이 되던 해부터 과거에 응시했죠. 과거와는 인연이 없었던지 계속 낙방의 고배를 마시던 이승만은 1894년에 터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와중에 단행된 갑오경장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서당 공부를 그만두죠
이후 그는 영어를 배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1895년 4월 신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에 입학했어요. 그곳에서 만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濟衆院)에서 일하던 미국인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면서 자연스레 영어 실력을 높였지요. 배재학당을 졸업하던 1897년에는 귀빈 앞에서 '한국의 독립'이라는 주제로 영어 연설을 할 수준에 이르렀지요.
◇옥중에서 집필한 독립정신
1899년 이승만은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고 새로운 혁신 내각을 조직하려는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옥살이했어요. 다행히 독립협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민영환 등의 노력으로 1904년에 특별사면령을 받고 석방됐죠. 5년 7개월간 옥중 생활을 하던 이승만은 러일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에 두 열강의 싸움에 희생양이 될 대한제국의 운명을 한탄하며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썼어요. 이 책에서 그는 조선 왕국을 폭풍우를 만난 배에 비유하며 집권층인 선원과 백성인 선객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힘을 합쳐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죠. 정식 출간은 못 했던 이 책은 이후 많은 사람이 돌려 보았다고 해요.
석방 후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요. 서른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조지 워싱턴 컬럼비아대 학부에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죠.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는데도 석·박사를 2년 반 만에 땄죠. 박사 학위를 딴 다음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쓰며 선교사로 생활하다가 하와이로 다시 건너가 교포들에게 민족 교육을 했어요.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쓰던 민족 지도자들이 3·1운동 소식을 접하고 독립운동을 펼쳐나갔어요.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독립 이후의 건국을 논의하며 필라델피아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3·1운동과 같은 시가행진을 벌였죠. 그 직후 1919년 9월 11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인 국민회, 서울의 한성정부 등이 합쳐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어요. 외교 활동의 주 무대인 미국에서 공부를 오래했고 인맥이 두터웠기 때문이지요. 이때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식 영어 명칭을 'Republic of Korea'로 칭했어요.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며 임시정부를 승인해주도록 미국과 영국 등 열강에 끊임없이 요청했어요.
- ▲ 1935년, 이승만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찍은 사진. /기파랑 제공
희망과 좌절 사이를 헤매며 분투하는 동안 이승만은 운명의 반려자를 만났어요.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시작부터 쉽지 않았지만, 한평생을 그의 곁에서 머물며 동지가 되어주었죠.
또 이승만은 1941년에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을 역사적으로 밝히고 일본이 곧 미국을 공격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는 내용의 '일본 내막기'를 출간했어요. 그로부터 몇 달 후 실제로 그런 상황(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벌어지자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죠.
◇대한 독립 만세, 그러나 또다시 만난 시련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았어요. 그러나 남한에 주둔한 미군이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적 통치 기구는 미국 군사정권임'을 선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모든 기존 정치 세력의 대표성을 부인했죠. 미·영·소 3국 외무장관 회의가 한반도의 신탁통치에 합의하여 우리 국민은 독립의 희열을 미처 맛보지도 못했죠. 신탁통치에 가장 먼저 반대하고 나선 인물 역시 이승만이었어요.
참다못한 이승만은 미국의 여러 방해 공작에도 굴하지 않고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자주독립국 수립을 강력히 호소하기도 했어요. 결국 이 문제는 유엔으로 넘겨졌고, 1948년 5월에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 총선거를 하게 되었고요. 이 선거에서 이승만이 초대 국회의장으로 뽑혔고 7월 17일엔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었습니다. 이 헌법에 따라 국회에서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어요. 그리하여 드디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건립된 것이죠.
집권 말기에 이승만은 측근들의 비리를 막지 못하여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됐어요. 이승만은 비록 죽었지만, 데모하다 다친 학생들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고 했다거나, 국권이 수탈되던 당시에도 '나라를 뺏기는 것은 가슴 아프나 왕, 귀족, 천민 등의 계급이 사라진 것은 시원하다'고 했을 만큼 평등한 사회, 백성이 행복한 사회를 꿈꾸었던 그의 진심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있답니다.
[함께 생각해봐요]
이 밖에도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했던 활동에는 무엇이 있는지, 더 알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