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116년… 그들은 무엇을 위해 오랜 시간 싸웠을까

입력 : 2015.08.28 03:09

[백년전쟁 역사]

중세 유럽, 봉건제도로 약했던 왕권
'노르만 정복'으로 갈등 생겨나며 프랑스·영국 간 영토 싸움 시작돼
휴전·전쟁 지속하며 싸운 '백년전쟁'… 많은 희생 있었지만 왕권은 강해져

바다를 사이에 놓고 마주 선 영국과 프랑스가 난민 문제로 요즘 떠들썩해요. 세계 각국에서 더 나은 삶을 찾아 영국행을 택한 난민들이 브리티시 드림(British Dream)의 꿈을 안고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로 모여들고 있어요. 칼레는 영국의 포크스톤까지 해저로 연결된 유로터널이 시작되는 곳이고, 도버까지 페리호가 운항을 시작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이곳에서 영국에 밀입국하려는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터널로 진입하거나 화물차에 몸을 숨기고, 혹은 밀항을 하고 있어요. 칼레가 난민촌이 되면서 영국과 프랑스 간에 유로터널 관리를 두고 날 선 공방도 계속되고 있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영불해협은 직선거리 약 34㎞로 그 거리가 좁기 때문에 숙명처럼 많은 전쟁에 휘말려야만 했어요. 오늘은 중세 유럽의 판도를 뒤바꾼 백년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해요.

중세 유럽의 판도를 뒤바꾼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을 담은 그림.
중세 유럽의 판도를 뒤바꾼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을 담은 그림. /위키피디아

봉건제도가 한창이던 중세 유럽에서 왕은 충성을 맹세한 봉신(귀족)에게 봉토(땅)를 주어 다스렸지요. 여러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여러 지역의 땅을 봉토로 받을 수도 있었죠. 당연히 왕권은 약했고, 오늘날과 같은 국가나 국민의 개념은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웠어요. 1066년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을 다스리던 귀족이 바다 건너 잉글랜드(오늘날의 영국)를 점령하고는 영국의 왕이 되는 역사적인 일이 발생했어요. 노르만 정복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으로 윌리엄 1세는 영국의 왕이면서 동시에 프랑스의 귀족이라는 이중 신분을 갖게 되었죠.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 갈등의 씨앗이 되었어요.

백년전쟁에서 있었던 역사적 일화를 바탕으로 오귀스트 로댕이 만든 '칼레의 시민들' 조각상 사진
백년전쟁에서 있었던 역사적 일화를 바탕으로 오귀스트 로댕이 만든 '칼레의 시민들' 조각상. /위키피디아
세월이 흐르면서 프랑스 내에 있는 영국 왕의 땅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자신이 귀족의 위치에 있으니 권력에 대한 아쉬움이 컸어요. 반대로 프랑스 왕은 영국 왕을 프랑스에서 몰아내는 것이 숙원 사업이 되었고요. 결국 이 갈등은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전쟁으로 폭발했어요. 프랑스의 왕위가 4촌 형제였던 필리프 6세에게 넘어가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반박하고 나선 거예요. "내 어머니는 샤를 4세의 누이였다. 당연히 가장 가까운 왕위 계승 후보자는 조카인 나다." 게다가 영국과 손잡고 모직물 공업으로 호황을 누리던 플랑드르 지역의 상인들이 앞장서서 영국을 지원했죠. 프랑스 땅이지만 영국을 응원할 만큼 당시에는 국가나 영토의 개념이 부족했던 거예요. 1337년 시작된 전쟁은 자그마치 116년간 지속하다가 1453년에야 끝났어요. 사람들은 긴 전쟁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이라 부른답니다. 겉보기에는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 때문에 일어난 전쟁처럼 보이지만, 실은 플랑드르를 비롯한 땅을 차지하려는 전쟁이었죠.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된 랭스 대성당(사진 왼쪽), 프랑스 카페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백년전쟁을 일으키는 발단을 제공한 샤를 4세(사진 오른쪽).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된 랭스 대성당(사진 왼쪽), 프랑스 카페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백년전쟁을 일으키는 발단을 제공한 샤를 4세(사진 오른쪽). /위키피디아
전쟁은 처음에 영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했어요. 영국군은 갑옷을 뚫을 만큼 놀라운 위력을 지닌 석궁으로 무장했죠. 영불해협 건너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칼레를 포위하고 공격했어요. 칼레의 시민은 1년 동안 결사적으로 버텼지만, 결국 1347년 항복하고 말았어요. 이때 에드워드 3세는 시민을 살려주는 대신 그동안의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6명의 대표를 처형하겠다고 했어요. 누가 감히 죽음 앞에 선뜻 나설 수 있을까요? 그런데 "내가 시민의 대표로 죽음을 택하겠소!" 하며 용기 있게 외친 사람이 있었어요. 칼레에서 가장 큰 부자였던 생 피에르였죠. 그의 뒤를 따라 시장, 상인, 법률가, 귀족 등이 나섰다고 해요. 놀라운 희생정신이죠. 다행히 임신한 에드워드 3세 왕비의 간청으로 사형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로댕의 조각으로 다시 살아난 이들의 이야기는 칼레 시청 앞 광장에서 이기적인 세상을 향해 경종을 울리고 있죠. 이렇게 사회적으로 고귀한 위치에 있는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해요.

칼레가 함락되고 나서도 영국의 승리가 이어졌어요. 1356년에는 프랑스 왕이었던 장 2세가 포로로 잡혀 치욕을 당했죠. 결국 1360년 브레티니-칼레 조약이 맺어지면서 휴전 상태에 돌입하게 됩니다. 영국은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포기하는 대신에 이때부터 칼레를 새로운 영토로 얻었죠. 이후에 전쟁은 페스트, 농민반란 등을 겪으면서 휴전했다가 다시 싸우기를 반복해요. 이 전쟁이 만약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전쟁 말미에 신의 부르심을 받고 홀연히 나타난 잔 다르크의 활약 덕분에 프랑스는 승리할 수 있었어요. 프랑스군은 영국군을 몰아내고 프랑스 영토를 회복했어요. 다른 나라와 영토의 경계가 확실해지고 국가의 개념도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단 한 곳, 칼레만이 예외였지요. 이후에도 칼레는 영국의 영토로 남아 200년 동안 지배를 받았답니다. 영국은 대륙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섬나라로서의 인식을 강화했죠. 뜻밖에도 서로 다투고 미워하다가 영국인, 프랑스인이라는 국민의식이 생겨났어요. 전쟁 중 많은 귀족이 사망하면서 왕권이 강해져서 근대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전쟁 중 세금을 걷는 권리를 얻은 왕은 관료제와 상비군을 유지하며 강력한 권력의 기틀을 만들어 나갔어요. 백년전쟁은 오늘날 영국과 프랑스의 영토와 국민을 만들어준 전쟁이 되었죠.
공미라·세계사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