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세상을 바꾼 리더] 그녀의 평화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진정한 민주주의 올 때까지
입력 : 2015.08.27 03:08
[80] 아웅산 수지
- ▲ 버마(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아웅산 수지. /조인원 기자
아웅산 수지는 15세 되던 해, 어머니가 인도 대사로 임명되면서 인도로 떠나게 돼요. 인도에서 여대를 졸업한 아웅산 수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해 정치학, 철학, 경제학을 공부했어요. 수지가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1962년, 버마에서는 네 윈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어요. 네 윈은 아웅산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는데, 식민지 시절에 대한 심한 강박증 때문에 서방 사회를 적대시하는 '버마식 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펼쳤어요. 당시 아웅산 수지는 국제연합(UN) 사무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영국인과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죠.
버마는 점차 군부 정권의 악명 높은 통치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어요.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해가고 있었어요.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정부의 압제는 더욱 심해졌지요.
그러던 중, 아웅산 수지는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20년 만에 버마로 돌아오게 돼요. 그리고 1988년 8월 8일, 버마 근대사에서 가장 거대한 민주화 운동인 '8888 항쟁'이 일어났어요. 8888 항쟁은 랑군의 대학생이 주축이 되어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됐지만,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9월 18일 종료 때까지 수천 명이 희생되었어요.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는 계속되었지만, 군부는 그 시위를 잔인하게 짓밟았어요. 군대의 횡포를 눈앞에서 본 아웅산 수지는 극한 분노에 휩싸였어요. 결국 아웅산 수지는 버마 국민의 간절한 바람을 받아들여 민주화를 염원하는 정당인 민족민주동맹(NLD)을 이끌게 돼요. 아웅산 수지는 예전에 인도에서 배웠던 간디의 '비폭력 저항'을 떠올리며, 민주화를 위해 비폭력 저항과 평화 투쟁을 진행해요.
아웅산 수지는 전국을 돌며 민주화 투쟁을 하자며 호소하죠. 그리고 가는 곳마다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어요. 결국 군사정권은 아웅산 수지를 가택 연금하였어요. 게다가 군부가 보낸 괴한들에 의해 죽음의 위험에 처하기도 했죠. 이런 아웅산 수지의 상황과 군부의 잔인한 진압은 언론의 발달과 함께 점점 해외에 알려지게 되죠.
그리고 1991년, 아웅산 수지에게 노벨평화상이 수여돼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를 세계가 인정한 것이죠. 잔혹한 탄압에도 버마 국민의 민주화 운동이 점점 거세지자, 결국 군부는 당시의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 투표를 하고 단계적 민주화를 시행하겠다고 약속해요.
그렇게 한 선거에서 테인 세인이 미얀마 연방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요. 그는 군에서 퇴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민간인 대통령이었어요. 비록 군부 출신이었지만, 최초의 민간인 대통령 취임 후 버마의 폐쇄적이기만 했던 통치는 조금씩 완화되어 갔어요. 그해 감옥에 있던 수백 명의 민주화 인사가 대거 석방됐고, 아웅산 수지의 가택 연금 역시 완전히 해제되었어요. 하지만 아직 버마의 민주주의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에요. 아웅산 수지는 지금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1분 상식]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이란 무엇인가요?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고 있던 1919년, 영국은 인도를 더욱 강하게 탄압하기 위해 '롤래트 법'을 제정하였어요. 인도 국민이 영국에 반항하는 운동을 하면 체포영장을 발부할 필요도 없이 무조건 잡아들일 수 있다는 법이었죠. 이런 말도 안 되는 법에 인도인들은 반발하며 시위를 벌였어요. 그러나 영국군은 시위대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4000명이 넘는 희생자가 생겼답니다. 이 사건은 간디를 중심으로 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기폭제가 됐어요. 간디는 전 인도인에게 똑같이 폭력으로 대응하지 말고, 영국 상품 불매, 납세 거부, 공직 사퇴 등으로 맞서자며 시위했어요.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전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