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총을 든 14세 소년… 시대가 만든 비극이었다

입력 : 2015.08.14 03:10

[히틀러 청소년단의 어두운 역사]

1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 겪던 독일
빈곤한 삶 벗어나고 싶던 국민에게 히틀러, 꿈 심어주며 권력 잡아
아리아인 청소년 모아 세뇌·훈련해 죄의식 없이 전쟁 참여하게 했어요

오늘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임시 공휴일이에요. 70년 전 오늘, 일본 제국주의는 연합국에 항복을 통보했지요. 그리고 다음 날인 8월 15일에 쇼와 천황이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방송을 하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이 이루어졌어요. 일본의 항복을 끝으로 인류를 전쟁의 광풍 속으로 몰아넣었던 제2차 세계대전도 끝이 나게 되었어요. 전쟁을 일으킨 나라도, 피해를 본 나라도 예외 없이 사상자가 발생해서 약 2700만 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자그마치 2500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비극이었지요. 특히 난징 대학살, 도쿄 대공습, 드레스덴 폭격, 유대인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비윤리적인 만행이 계속되었어요. 전쟁과 관련된 모든 사람은 당시 있었던 일들로 여전히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데요. 수요 집회에서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일본군위안부 할머니,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다는 유대인 할아버지, 원자폭탄의 피해를 호소하는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는 세월의 깊이보다 더 참담한 슬픔이 담겨 있어요. 또 한편에는 가해자이기 때문에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직도 죄책감을 벗지 못한 사람들도 있어요. 전쟁이 가져온 희생자들인데요. 히틀러의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히틀러 청소년단(히틀러 유겐트·Hitler-Jugend)'도 그중 하나예요.

나치당의 소년 멤버와 함께 서 있는 히틀러(위). 그는 나치즘 교육을 일찍부터 어린이들에게 세뇌하려고 노력했어요. 독일 나치당이 만든 청소년 조직인 ‘히틀러 청소년단’의 행진 모습(아래).
나치당의 소년 멤버와 함께 서 있는 히틀러(위). 그는 나치즘 교육을 일찍부터 어린이들에게 세뇌하려고 노력했어요. 독일 나치당이 만든 청소년 조직인 ‘히틀러 청소년단’의 행진 모습(아래). /Corbis / 토픽이미지

1930년대 독일의 사정은 매우 좋지 않았어요. 1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았기 때문이지요. 알자스-로렌 지방을 비롯한 크고 작은 땅을 잃어버렸고, 막대한 배상금은 도저히 갚아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어요. 새로 들어선 민주주의 정부는 혼란만 가중시킨 가운데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공황은 경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말았지요. 누군가 나서서 빈곤한 삶을 해결해주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독일인이 이런 생각을 할 즈음,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했어요. 1934년에는 독일의 수상 겸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은 위대하고 강한 독일의 꿈을 심어주면서 권력을 장악했어요.

히틀러는 특히 푸른 눈에 금발머리를 한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강조했어요. 아리아인을 대상으로 일찍부터 나치즘을 교육하기 위해 1920년대 나치당이 만든 청소년단체(이후 '히틀러 청소년단'으로 불림)를 확대하기 시작해요. 1934년에는 히틀러 청소년단을 제외한 모든 청소년 단체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독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청소년 단체가 되었지요. 1936년에는 독일의 모든 건강한 청소년은 강제 가입하게 하는 법이 만들어졌어요. 1939년에는 무려 800만 명이 가입한 거대한 조직이 되었어요. 아이들은 만으로 10세가 되면 인종 검사를 받아야만 했어요. 대대로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혈통증명서를 받아 남자아이들은 독일소년단에, 여자아이들은 독일소녀단에서 4년 동안 활동했어요. 그리고 14세가 되면 히틀러 청소년단이 되었지요. 18세가 되면 나치당의 정식 당원이 될 수 있었어요.

히틀러 청소년단 단기(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베를린 거리(아래).
히틀러 청소년단 단기(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베를린 거리(아래). /위키피디아

히틀러 청소년단에서는 강한 체력을 기르기 위한 활동이 이어졌어요. 수영, 야구, 달리기, 체조, 담력 훈련을 했어요. 야간에는 인종이나 나치당에 대한 이론을 공부했어요. 주말에는 하이킹을 떠나 야전 훈련, 모의 전쟁, 캠프파이어, 지도 읽는 법 등의 활동을 했어요. 나중에는 군대 조 짜기, 전쟁 중 들키지 않고 이동하기, 총 쏘기, 수류탄 던지기 등 군인이 될 준비를 했어요. 여자아이들은 훌륭한 아내가 되는 훈련을 받았지요. 이제 갓 사춘기가 된 청소년의 마음을 끌기 위해서 갈색 제복, 깃발, 화려한 배지, 번쩍이는 군화와 완장이 제공되었어요. 군악대와 함께하는 퍼레이드는 아이들을 설레게 했죠.

군대와 같은 조직 생활은 무조건 상관에게 복종을 강요했어요. 획일적으로 히틀러의 사상을 전수받아 나라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부모도 고발하도록 세뇌되었죠. 실제로 엘리자베트 페터라는 8세 어린이의 부모는 딸의 고발로 비밀경찰에게 끌려가 3~4주 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했어요. 청소년단원은 나치당의 사상을 알리기 위한 캠페인에 동원되고, 유대인을 색출하는 작업을 했어요. 점점 '충성스럽게 살고, 죽음을 거부하고 싸우며, 웃으면서 죽는다'는 강령을 실천하는 히틀러의 비밀 병기가 되어갔지요. 드디어 1939년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부터는 후방의 독일군으로 활동했어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14세의 어린 소년들은 폭격을 무릅쓰고 참호를 뛰어다니며 전쟁에 참여했어요. 폭격이 끝나면 시체를 수습하고, 청소하는 역할도 이들의 몫이었죠. 육·해·공군의 특수부대에 편성된 소년들은 잔인한 살인도 서슴지 않았어요. 히틀러의 자살로 독일이 항복한 이후에도 철저하게 세뇌되어 한동안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어요.

만약에 이들이 히틀러의 아이로 성장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다른 인생을 살았겠죠? 배우고 익힌 대로 독일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이들의 활동은 정당하지 못했어요. 세월이 흐른 후에야 자신의 행동에 책임감을 느끼고 양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요. 하지만 이미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세계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요. 이들은 여전히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기 때문이에요. 이들과 이들에게 아픔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전쟁의 아픔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예요.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가 평화를 지켜야 하는 이유이지요.

 

공미라·세계사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