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명옥의 명작 따라잡기] 때론 사납고 때론 우직하게… 인간과 함께한 소

입력 : 2015.08.07 05:01 | 수정 : 2015.08.07 05:05

고대부터 좋은 사냥감이었던 소, 동굴 벽에 그려 넣고 사냥 성공 기원
자전거 안장·핸들로 만든 '황소 머리'
작가 내면세계 담아낸 '소' 그림 등 각기 다른 방법으로 소 표현했어요

1879년 여름, 스페인 북부 산탄데르 지방의 영주인 돈 마르셀리노 사우투올라는 어린 딸과 함께 산티야나 델 마르 마을의 알타미라 동굴을 탐사하고 있었어요. 그는 아마추어 고고학자였지요. 그런데 비좁은 굴 속을 살피던 딸이 갑자기 탄성을 질렀어요. 동굴 벽면과 천장에서 들소, 말, 사슴들이 생생하게 그려진 동물 그림을 발견했거든요. 어린 소녀가 기원전 2만5000년 내외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선사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암벽화를 인류 최초로 발견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 지방에 있는 라스코 동굴벽화도 1940년, 소년 네 명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어요. 라스코 동굴 벽면에도 들소, 말, 사슴 등 다양한 동물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들소 그림은 원시인이 그렸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사실적이고도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어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죠. 사진1과 사진2는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라스코 동굴벽화를 촬영한 부분을 확대한 것인데 두 그림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은 동물 그림 중 특히 들소가 사실적으로 그려졌다는 것이죠.

사진 1 - 알타미라 동굴벽화, 사진 2 - 라스코 동굴벽화 사진
사진 1 - 알타미라 동굴벽화, 사진 2 - 라스코 동굴벽화

원시인들은 왜 사람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동굴 안에 소를 그렸던 걸까요? 학자들은 사냥과 채집을 하던 구석기인들이 성공적인 사냥을 기원하기 위해 들소를 그렸다고 말합니다. 동굴 벽에 사냥 대상인 동물 그림을 그려 놓고 창을 던지면 실제로 짐승이 죽는다고 믿었던 것 같아요. 몹시 거칠고 사나우며 힘이 매우 센 들소는 강한 힘의 상징이며 가장 좋은 사냥감이기도 했어요. 원시인들은 동물 사냥을 나가기 전, 이런 의식 행위를 통해 두려움을 없애 용감하게 동물 사냥에 나갈 수 있었다는 겁니다. 선사시대 이후 농경사회에 접어들면 소는 인류에게 더욱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조선시대 풍속화의 거장 단원 김홍도의 작품 3에서 이를 확인해볼까요?

김홍도, 논갈이 작품 사진
작품 3 - 김홍도, 논갈이,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위쪽의 두 농부는 쇠스랑으로 밭을 일구고 아래쪽의 한 농부는 소의 도움으로 쟁기질을 하고 있네요. 그런데 쟁기를 끄는 소가 두 마리군요. 소 한 마리에 멍에를 지우는 것을 외겨리, 소 두 마리에 쌍멍에를 지우는 것을 쌍겨리라고 합니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장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런 농사법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강명관 부산대 교수는 대개 논밭을 갈 때 땅이 평평하여 쉽게 흙을 팔 수 있으면 외겨리로, 화전 같은 경사지와 흙이 단단하거나 돌이 많은 곳은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쌍겨리로 농사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강 교수는 결과적으로 지켜지지는 못했지만 조선시대에 왕이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을 만큼 소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고 말했어요. 소는 농사를 짓는 데 꼭 필요한 가축인 데다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한 고기를 제공해주고 짐수레를 끄는 일도 도맡았기 때문이지요. 김홍도의 그림은 당시 소가 농가의 최고 재산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어요.

이중섭, 흰 소 작품 사진
작품 4 - 이중섭, 흰 소, 1954년경,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런가 하면 국민화가로 불리는 이중섭은 분노하는 소를 그렸어요. 작품 4의 흰 소는 한눈에도 무척 거칠고 사나워 보입니다. 힘든 농사일도 묵묵히 참아내는 우직하고 순한 소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앞으로 뛰어나가 상대를 공격할 것만 같은 위험한 소입니다. 소의 표정과 동작, 색, 붓질에서도 강한 분노가 느껴집니다. 소의 몸은 어두운 색, 힘이 들어간 근육의 윤곽은 흰색인데, 이 색들을 꼼꼼하게 덧칠하지 않고 강하고 빠르게 칠했어요. 덕분에 소 근육의 움직임과 화난 감정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었어요. 이중섭은 왜 분노하는 소를 그렸을까요?

흰 소는 현실의 평범한 소가 아니라 화가 자신을 의미합니다. 이중섭은 6·25 전쟁 동안 부산과 제주도를 오가며 힘든 피란살이를 했어요. 가난에 시달리던 나머지 사랑하는 가족과 영원히 헤어지는 아픔도 겪었어요. 그런 민족의 비극과 자신이 겪은 고통의 감정을 성난 소의 모습을 통해 표현한 거죠. 아울러 현실의 절망과 불행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예술가의 의지도 분노하는 소에 담겨 있습니다.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는 소를 미술의 영역을 넓히는 실험적 도구로 사용했어요.

피카소, 황소 머리 작품 사진
작품 5 - 피카소, 황소 머리, 1942년.

작품 5의 재료는 재밌게도 폐자전거예요. 어느 날 피카소는 아파트 근처 쓰레기더미에서 가죽이 늘어지고 스프링도 없는 자전거 안장과 핸들을 발견했어요. 피카소의 눈에는 핸들이 수소의 뿔, 안장은 소의 얼굴로 보였던 것이지요. 그는 자전거에서 핸들과 안장을 떼 둘을 용접하고 나서 '황소 머리'라는 멋진 제목을 붙였어요. 피카소는 소가 지닌 상징성이나 소가 인간에게 주는 의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창작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의 생김새였어요.

폐품을 재활용한 이 작품은, 미술 작품은 비싼 재료를 사용해 예술가가 직접 만든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예술가들은 똑같은 대상도 남과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각자 다르게 표현합니다. 소를 표현한 예술 작품이 각각 다른 것처럼 우리도 다르게 보고 다르게 표현하는 훈련을 쌓아야겠어요.

 

이명옥·사비나 미술관 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