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교과서 여행] '독립' 외치다 희생된 그들의 흔적… 교회 곳곳에 남아 있어요
입력 : 2015.08.05 03:07
[124]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
8월 15일 광복절은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날이에요.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았는데, 위안부 문제 등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이 남아 있어요.
오늘 찾아갈 곳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마을 사람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무참하게 살해한 현장, 바로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제암리교회예요. 현재 이곳엔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만들어져 있고, 교회가 있던 자리에는 순국기념탑이 세워져 있어요. 그리고 양지바른 언덕에 당시 희생됐던 23명의 합동 묘지가 있습니다.
그럼 제암리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1919년 4월 15일 오후, 일본군 중위 아리타는 11명의 부하, 일본인 순사 등과 제암리에 왔어요. 특별히 순시할 일이 있으니 15세 이상 마을 남자들은 모두 교회로 모이라고 했죠.
오늘 찾아갈 곳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마을 사람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무참하게 살해한 현장, 바로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제암리교회예요. 현재 이곳엔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만들어져 있고, 교회가 있던 자리에는 순국기념탑이 세워져 있어요. 그리고 양지바른 언덕에 당시 희생됐던 23명의 합동 묘지가 있습니다.
그럼 제암리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1919년 4월 15일 오후, 일본군 중위 아리타는 11명의 부하, 일본인 순사 등과 제암리에 왔어요. 특별히 순시할 일이 있으니 15세 이상 마을 남자들은 모두 교회로 모이라고 했죠.
- ▲ (왼쪽 사진)1919년 3·1운동 직후 일제의 만행으로 많은 희생자를 냈던 제암리교회. (오른쪽 사진)당시 불탄 예배당 터에는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순국기념탑이 세워져 있답니다. /조선일보 DB·임후남 제공
군인들은 교회당 아래쪽 집들로 불길이 옮아 타오르자 불길이 옮아 붙지 않는 위쪽 집에는 일부러 불을 질렀어요. 마을 전체를 그야말로 쑥대밭을 만들어버린 거죠. 일본군이 이토록 한 마을과 한 가족을 몰살한 이유는 바로 3·1운동의 주동자들을 말살하겠다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은 제암리가 있는 경기도 수원· 화성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거든요.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 주민들이 발안 지역의 장날을 이용해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주재소가 습격당하기도 했어요.
200여명으로 시작된 만세 운동은 며칠 후인 4월 3일에는 2000여명으로 늘어났죠. 만세 운동이 격렬해지자 일본군은 진압에 혈안이 됐어요.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펼쳐 시위 주동자들을 검거하려 했죠. 특히 만세 운동 주동자로 지목된 천도교 지도자 백낙열과 감리교 전도사 김교철 등을 체포하려고 수촌리라는 마을을 급습해서 교회와 집들을 불태우고, 김교철을 비롯해 수백 명을 검거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백낙열은 잡히지 않고, 3월 31일에 있었던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도 잡히지 않자 아리타 중위는 제암리에 사는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을 주동자라고 생각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거죠.
제암리교회 사건은 이튿날 바로 알려졌어요. 언더우드 선교사 등이 우연히 제암리 참상을 목격하고는 세상에 알렸거든요. 며칠 후 소식을 듣고 혼자 내려온 스코필드(한국 이름 석호필) 선교사는 불에 탄 시신들을 한데 모아 묻는 등 사후 수습에 나섰어요. 그리고 제암리 사건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과 캐나다 선교 본부, 신문사 등에 보내고 '끌 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통해 제암리 학살 사건을 전 세계에 알렸어요.
순국기념관으로 들어가면 당시 상황을 사진과 영상 자료들을 통해 볼 수 있어요. 특히 발굴 현장에서 나온 불에 그을린 대못과 단추, 숯, 깨진 맥주병 등은 당시 처참했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답니다.
[1분 상식] 3ㆍ1운동이란 무엇인가요?
1919년 3월 1일 천도교, 기독교, 불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민족 대표 33인이 종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시작된 만세 운동으로 전국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어요. 종로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다시 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는데 큰 도시뿐만 아니라 작은 마을까지, 그리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참여한 독립운동이에요. 유관순 열사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아우내장터에서 운동을 벌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