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백제 마지막 수도, 사비서 부흥 꿈꾸다
무령왕 뒤이은 백제 26대 임금 성왕
넓은 벌판 펼쳐진 부여로 도읍 옮겨 과거 땅·영광 되찾겠다는 뜻 품어요
宮 방어 위해 지은 나성·부소산성 등 사비 시대의 백제 흔적 엿볼 수 있어
지난주에는 최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에 대해 알아보았어요. 아울러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이 있는 공주에서 백제는 어떤 역사를 펼쳤는지 살펴보았고요.
이번에는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나성 등 부여에 있는 유적에 대해 알아볼까 해요. 부여에서 백제는 또 어떤 역사를 이어갔는지도 알아보고요. 그럼 지금부터 538년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볼까요?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지를 옮기다
웅진 즉, 오늘날의 공주에서 나라의 안정을 되찾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던 백제 제25대 무령왕이 523년에 61세로 세상을 떠나자 명농이라는 아들이 왕위를 이었어요. 그가 백제 제26대 임금 성왕이에요. '삼국사기'에는 성왕에 대해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결단력이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천도와 지리에 통달해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라고 기록돼 있지요.
이런 기록들처럼 성왕은 538년에 나라의 앞날을 위해 중요한 지리적인 결단을 내려요. 그 결단은 나라의 도읍지를 옮기겠다는 것이었지요.
- ▲ 그림=이창우
"도읍지를 옮기는 것이 좋겠소. 호시탐탐 공격할 기회를 엿보는 고구려 진영과 거리도 좀 떨어진 것이 좋을 것이고, 웅진은 한 나라의 도읍지로서는 좀 작은 것 같으니 넓은 벌판이 펼쳐진 곳으로 옮깁시다."
"어디로 옮기는 것이 좋을까요?"
"사비로 옮기고, 나라 이름도 백제에서 남부여로 바꿀 것이오."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사비는 오늘날의 충남 부여이며,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꾼 것은 부여의 후손으로 반드시 고구려를 물리쳐 부여의 땅과 영광을 되찾겠다는 뜻이었지요. 성왕은 도읍지를 사비로 옮기고 나서 통치 조직을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중앙에 22개 관청을 만들고, 수도를 5부, 지방을 5방으로 나누어 왕의 명령이 잘 전달되게 했지요. 중국의 양나라와 교류를 하며 문화를 발달시키고 일본과도 친하게 지내며 불교와 앞선 백제의 문화를 전해주기도 했고요.
물론 새로 옮긴 도읍지에 왕궁을 짓게 하고 도읍지를 방어할 성을 고쳐 쌓게 하였어요. 이때 도읍지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외곽 방어 시설이 부여 나성이며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성이 부소산성이에요. 도성 안에 지어진 왕궁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터가 관북리 유적으로 남아 당시 왕궁의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고요. 또한 도성 안에는 절이 세워졌는데 그 절터에 백제인이 세운 멋진 5층 석탑이 남았어요. 후세 사람들은 그 절터를 정림사지라고 불렀지요.
◇신라의 배신과 성왕의 죽음
성왕은 551년에는 신라와 손잡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 했어요. 그러나 신라가 등을 돌려 백제군을 공격해 한강 중·하류 지역을 빼앗자 554년에 직접 관산성이란 곳에서 신라군과 전투를 벌여요. 그때 성왕은 안타깝게도 신라군에게 기습 공격을 당해 목숨을 잃고 말지요. 이때 3만명이나 되는 백제군도 몰살을 당하고요. 백제 부흥의 기세가 꺾이는 순간이었어요.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성왕의 시신이 묻힌 곳으로 짐작되는 무덤이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에 있어요. 능산리 고분군은 대표적인 백제 왕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지요. 이 중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2호 무덤을 성왕의 무덤으로 짐작하고 있어요.
능산리 고분군은 일찍이 도굴되어 약간의 유물만 발견되었을 뿐 이렇다 할 유물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1993년에 능산리 고분군 옆에서 백제를 대표할 만한 위대한 유물이 발견되었어요. 능산리 절터의 진흙 속에서 여러 유물과 함께 훼손되지도 녹슬지도 않은 아름답고도 찬란한 금동향로를 발견한 것이에요. 향로란, 불전에 향을 피울 때 쓰는 도구예요. 높이가 약62㎝, 무게가 11.8㎏이나 돼요.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한 유물
향로는 전체적으로 청동으로 이뤄졌으며 그 겉면은 금을 칠해서 만들었어요. 보통 향로는 높이가 20㎝ 정도인데 그 3배나 되는 대형 향로이니 그 이름을 백제 금동대향로라고 하였지요. 향로 자체의 아름다운 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인물과 동물, 풍경 등 향로 전체에 정교하게 새겨진 조각 하나하나가 마치 화폭 위에 손으로 그림을 그린 것처럼 생생해 고대 동아시아의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그런데 백제 금동대향로가 발견된 2년 뒤인 1995년에 능산리 절터에서 또 하나의 놀라운 유물이 발견되었어요. 부처의 사리를 넣어두는 용기를 보관하는 사리감이었는데 그 사리감에 백제 창왕 때 그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만들었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지요. 창왕은 성왕의 아들로 성왕이 죽임을 당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백제 제27대 위덕왕을 말해요. 이는 능산리에 있던 절은 위덕왕 때 왕실에서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래서 많은 학자는 백제 금동대향로 역시 성왕을 추모하기 위해 위덕왕이 만들었거나 또는 위덕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어요.
[함께 생각해봐요]
백제 금동대향로의 몸체엔 26마리의 동물이, 뚜껑에는 겹쳐진 산의 모습과 함께 나무와 바위, 산길, 시냇물, 폭포 등과 함께 곡을 연주하는 악사들을 비롯해 여러 인물과 조각돼 있어요. 동물 조각 중에는 코끼리와 원숭이, 악어, 사자 등 삼국시대 한반도에 살지 않았던 동물들도 있지요. 금동대향로를 만든 백제인들은 어떻게 한반도에 살지도 않는 동물들을 향로에 새겨 넣은 것일까요? 또 그런 동물들을 향로에 조각했다는 것은 어떤 뜻이 있는 걸까요? 생각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