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공산성' 지은 백제… 제2의 도약 꿈꾸다
입력 : 2015.07.20 03:07
한강 유역 위례성 쌓으며 세운 백제… 고구려 침략으로 도읍지 함락돼
지리적 조건 좋은 '웅진'으로 옮겨 새 도읍지 방어하는 공산성 쌓아 나라의 안정 되찾으려 노력했어요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우리나라에서 12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어요.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충남 공주와 부여 그리고 전북 익산에 있는 백제 시대의 대표 유산을 한데 묶은 것이에요. 문화유산들을 살펴보면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나성,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등 8곳이지요. 공주와 부여, 익산은 백제의 역사 속에서 어떤 곳이었고, 그곳에 있는 문화유산들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요? 우선 공주와 공주에 있는 문화유산을 알아보러 475년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볼까요?
◇고구려의 침략과 개로왕의 죽음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고구려에서 내려온 온조가 한강 유역에 위례성을 쌓으며 세운 나라였어요. 약 500년 동안 한강 유역에 도읍지를 정하고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영토를 넓히며 문화를 발달시켜 나갔지요. 그러다가 475년에 도읍지를 남쪽으로 옮겨야 하는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어요. 고구려 군사들에게 도읍지와 궁궐까지 침략당하고 만 것이에요.
◇고구려의 침략과 개로왕의 죽음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고구려에서 내려온 온조가 한강 유역에 위례성을 쌓으며 세운 나라였어요. 약 500년 동안 한강 유역에 도읍지를 정하고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영토를 넓히며 문화를 발달시켜 나갔지요. 그러다가 475년에 도읍지를 남쪽으로 옮겨야 하는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어요. 고구려 군사들에게 도읍지와 궁궐까지 침략당하고 만 것이에요.
- ▲ /그림=이창우
◇웅진으로 도읍지를 옮기다
개로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은 문주라는 인물이 백제 제22대 임금인 문주왕이에요. 문주왕은 도읍지가 이미 폐허가 되었고, 고구려 군사들이 아차산에 머무르자 어쩔 수 없이 도읍지를 남쪽으로 옮겨야 했지요.
"어디로 도읍지를 옮기면 좋단 말인가?"
"폐하, 웅진으로 도읍지를 옮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웅진은 지리적으로 적들이 쉽게 공격해오기 어려운 하늘이 내려준 요새이옵니다."
웅진은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남쪽으로는 계룡산이 막고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요새 중의 요새였지요. 그래서 문주왕은 신하들과 함께 웅진으로 향했어요. 이에 백제의 도읍지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바뀐 것이에요. 웅진은 지금의 충남 공주이고요. 475년에 백제의 새 도읍지가 된 웅진에서 백제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반란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제24대 동성왕은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였고, 제25대 무령왕은 나라의 안정을 되찾고 백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지요.
◇공산성의 백제 때 이름은 웅진성
- ▲ /그림=이창우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 웅진 도읍기에 재위했던 왕과 왕족들의 옛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에요. 야트막한 언덕으로 무덤 7기가 모여 있는데 백제 왕들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짐작하지요. 무덤 중 1~6호분은 무덤에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고, 가장 나중에 발견된 무덤인 7호분만이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죠. 그 주인공은 바로 백제 제25대 무령왕이에요.
◇웅진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한꺼번에 보여준 문화유산
1971년 여름에 장마철이 오자 고분군이 물에 잠길 것이 우려됐어요. 그래서 그에 대비하고자 송산리 고분군 6호분을 보수공사했는데, 그 와중에 우연히 새로운 무덤이 발견되었어요. 바로 7호분이에요. 발굴 작업을 벌이던 중에 그 무덤에 묻힌 사람이 무령왕과 왕비라는 것을 알려주는 돌판을 발견했어요. 이를 통해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라는 것과 무령왕과 왕비의 나이와 사망한 날짜, 백제가 중국 양나라와 교류를 맺었다는 사실도 정확하게 알게 되었지요.
무덤 안에서는 기괴한 모양의 동물상인 석수, 금으로 만든 관의 장식물, 다양한 장신구 등 당시 백제의 문화 수준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어요. 무덤 자체로도 화려하고 세련된 백제의 건축 수준과 예술성을 보여주었고요. 웅진에서 다시 피어올랐던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유적이라 그 가치는 어마어마했지요. 나아가 무덤이 벽돌을 쌓아 만드는 중국 남쪽 지역의 무덤 형식을 갖추고 있었고, 중국에서 만든 도자기와 무령왕과 왕비의 관에 금송이라는 일본산 나무를 사용한 점 등을 통해 당시에 백제가 중국, 일본과 활발한 국제 교류를 했었다는 것도 알게 해주었답니다.
[함께 생각해봐요]
'삼국사기'에는 문주왕이 개로왕의 아들,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일본서기'에는 백제인이 썼다고 전하는 '백제신찬'이라는 역사책을 인용하여 문주왕을 개로왕의 동생, 무령왕이 개로왕의 친아들이면서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양아들로 기록하고 있어요. 역사학자 중에서도 문주왕이 개로왕이 통치할 때 상좌평이 되어 그의 통치를 도운 것을 보면 아들보다는 동생일 가능성이 더 크며,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돌판에서는 무령왕의 나이가 동성왕과 비슷하여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아니라 형제 관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요. 과연 어떤 기록이 더 정확한 것일까요? 생각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