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에스파냐… 어쩌다 네 번의 국가 부도 났을까
에스파냐 왕위 물려받은 펠리페 2세, 남아있던 빚 때문에 최초 부도 선언
銀 증가로 잠시 재정위기 극복하나 잦은 전쟁에 산업 기반 없어 빚 늘고
네 번째 부도까지 맞이하게 돼요
그리스의 재정위기를 두고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가 귀를 쫑긋하고 있어요. 그리스 정부가 IMF 등 국제금융기구에서 빌린 돈을 약속한 날까지 갚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야말로 국가 부도 상황이지요. 유럽의 경우 유럽연합에 속한 나라 중 19개 나라는 유로화라는 동일한 화폐를 사용하는데, 그리스도 그중 하나예요. 그래서 그리스의 위기는 다른 나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어요. 이 위기를 잘 넘기기 위해서 유럽의 여러 나라가 머리를 맞대고 협상안을 제시하고 있지요. 잘 극복한다면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것처럼 더 단단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국가 부도는 역사적으로 많은 나라가 겪어왔는데요, 가장 처음으로 국가 부도를 선언한 나라는 에스파냐랍니다.
- ▲ 거대한 영토를 통치했던 펠리페 2세가 생캉탱 전투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엘 에스코리알 궁전. /Corbis / 토픽이미지
16세기 카를 5세는 말 그대로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이었어요.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의 부와 권력을 지닌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뜻이에요. 아버지로부터 신성로마제국(독일·오스트리아 지역)을, 어머니로부터 에스파냐 왕국을 물려받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성시대를 열었어요. 그는 로마제국처럼 유럽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이 있었죠. 가장 큰 걸림돌은 루터의 종교개혁이었어요. 신교 세력을 막기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 전쟁했지만, 결국 신교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상심이 지나치게 컸을까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에스파냐를 물려주고 수도원에서 일생을 마감하게 되지요.
1556년 7월 에스파냐의 왕이 된 펠리페 2세는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버지에게서 에스파냐 왕위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빚도 함께 떠안았다는 것을 말이죠. 카를 5세가 전쟁 경비 마련을 위해 대출을 받으면서 몇 년치의 세금이 몽땅 담보로 잡힌 거예요. 기한이 되어도 갚을 수 없는 빚 때문에 왕이 된 이듬해에 최초로 국가 부도를 선언하게 됩니다. 아버지보다 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펠리페 2세는 검은색 옷만 입을 정도로 성격도 고집불통이었어요. 카를 5세는 아들에게 "아무도 믿지 말고, 오직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라"라고 했대요. 이 말대로 그는 신하들의 의견은 듣지 않고, 유럽의 가톨릭을 수호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며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지요. 결국 1560년 또다시 국가 부도 선언이 이어졌어요.
- ▲ 펠리페 2세는 에스파냐 최전성기의 통치자이자, 국가 파산을 4번이나 경험한 왕이었어요(오른쪽 위). 에스파냐 무적함대가 영국 함대에 대패하며 대서양의 주도권을 영국에 넘겨주게 한 칼레 해전의 모습(왼쪽 위).16세기에 다량의 은이 거래됐던 에스파냐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인 세비야. /위키피디아
꼼꼼하고 보수적인 성격은 종교를 위해서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어요. 신교와 관련된 책은 일절 읽지 못하도록 하고, 종교전쟁에 계속 뛰어들었어요. 신교도가 많던 식민지 네덜란드에서 강한 저항이 일어났어요. 프랑스의 가톨릭을 지원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지요. 게다가 이슬람교도에게도 엄격했어요. 3년 안에 에스파냐어를 익히지 못하면 처벌하고, 아랍 복장도 금지했어요. 종교를 바꾸지 않으면 가혹한 세금을 내도록 했지요. 경제력을 지닌 이슬람교도들이 에스파냐를 떠나기 시작했어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순수한 혈통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에스파냐를 떠나야만 했어요. 경제력을 지닌 사람들이 떠나면서 금융은 휘청거리기 시작했지요. 1575년 펠리페 2세는 세 번째 국가 부도를 선포했어요.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어오는 은(銀)이 증가하면서 재정위기는 빠르게 극복되었어요. 당시 전 세계 금과 은의 대부분은 에스파냐로 몰려들고 있었지요. 무역항이었던 세비야는 흥청거리고, 사람들은 사치품을 사들였죠. 물가는 폭등하고, 별다른 산업 기반이 없던 에스파냐는 은을 소비하는 데 정신없었어요. 결국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은은 아주 잠시 에스파냐를 거쳐서 외국으로 모두 빠져나갔답니다.
이 무렵 펠리페 2세는 영국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어요. 영국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국교회라는 신교를 믿는 것이 탐탁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은을 실어 나르는 배를 약탈하던 영국 해적 드레이크에게 엘리자베스 1세가 기사의 작위를 수여한 것 때문에 심기가 몹시 불편했어요. 설상가상으로 청혼을 거절당하면서 자존심에 큰 상처가 남았죠. 엘리자베스 1세는 네덜란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가톨릭 신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처형해 버렸어요.
사사건건 에스파냐와 반대편에 서는 여왕에게 울분을 토하던 펠리페 2세는 대규모의 함대를 조직하기 시작했어요. 막대한 비용은 아메리카에서 들어오는 은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1588년 130척의 무적함대를 끌고 영국을 공격했어요. 그 유명한 칼레 해전이에요. 훌륭한 전술과 변덕스러운 날씨를 잘 이용한 영국이 승리했고 무적함대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무적함대만 사라진 건 아니었어요. 화수분처럼 계속될 것 같았던 은이 다른 나라로 유유히 사라지고, 금융 엘리트 역할을 하던 유대인도 빠져나가고, 계속된 전쟁 비용에 빚은 더 늘어만 갔어요. 결국 1596년 네 번째 부도 선언에 이릅니다.
펠리페 2세는 에스파냐, 포르투갈, 남아메리카, 네덜란드, 부르고뉴, 시칠리아, 나폴리, 인도 서해안, 아프리카 남서부 등 세계를 지배했어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빛나던 전성기에 국가 부도를 4번이나 경험한 왕이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