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사진으로 보는 세계] 유럽과 신대륙 잇던 '아바나'… 노예무역 슬픈 역사 간직하고 있답니다
입력 : 2015.06.08 03:06
15세기 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스페인) 사람들은 이슬람 상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향신료를 사오기를 기대하며 인도를 찾아 먼 길을 떠났어요. 유럽의 범선들이 세계를 돌며 식민지를 건설하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열린 것이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아냈고,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떠난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했어요. 반면, 에스파냐는 둥근 지구를 따라 서쪽으로 나가다 보면 인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콜럼버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의 탐험을 지원했죠. 마침내 1492년 어느 섬에 도착하게 된 콜럼버스는 그곳을 인도라 확신했죠. 하지만 훗날 그가 발견한 신대륙은 인도가 아니라 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일대였음이 밝혀졌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아냈고,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떠난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했어요. 반면, 에스파냐는 둥근 지구를 따라 서쪽으로 나가다 보면 인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콜럼버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의 탐험을 지원했죠. 마침내 1492년 어느 섬에 도착하게 된 콜럼버스는 그곳을 인도라 확신했죠. 하지만 훗날 그가 발견한 신대륙은 인도가 아니라 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일대였음이 밝혀졌죠.
- ▲ 콜럼버스 유해가 안치됐던 쿠바 아바나 대성당. /한성필 사진작가
자연스레 유럽과 신대륙을 잇게 된 도시 아바나는 빠르게 발전했어요. 중남미의 볼리비아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은이 아바나를 거쳐 스페인으로 흘러갔죠. 대규모 은광 개발의 광풍이 지난 다음,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과 카리브 해의 열대 기후에 알맞은 담배와 커피, 설탕 같은 상품 작물을 이곳에서 재배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16세기까지 비싼 사치품이었던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를 얻기 위해 대규모 농장도 이곳에 지었어요. 하지만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했죠. 이에 유럽 사람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강제로 데려와 노예로 부렸어요.
이러한 노예무역은 1800년대까지 왕성하게 이뤄졌고, 산업혁명의 주역인 영국의 주요 항구는 노예무역항으로 이름을 날렸어요. 한때 작은 어촌이었던 영국의 리버풀은 18세기 대규모 노예무역항으로 성장했죠. 즉, 노예무역으로 얻은 이익은 리버풀 인근의 직물공장을 만드는 데 쓰여졌고, 상인들은 영국산 제품을 서아프리카로 싣고 가 노예와 교환한 다음, 이 노예를 카리브 해에서 설탕과 맞바꿔 다시 처음 떠나온 유럽의 항구로 돌아오는 삼각 순환 무역을 한 것이죠. 이렇게 유럽의 공업제품과 아프리카의 노예, 아메리카의 설탕을 엮는 삼각무역으로 유럽인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답니다. 이에 일부 학자는 영국의 눈부신 산업혁명의 밑바탕에는 바로 아프리카인들의 희생이 깔려 있다고 말하기도 하죠. 발전을 위해 그간 희생된 것은 없는지 되돌아 보는 지혜가 필요할 듯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