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책으로 보는 세상] 당신은 누구나 차별 없이 대할 수 있나요?

입력 : 2015.06.03 03:07

[69] 로맹 가리 '자기 앞의 생'

노인·흑인 등 어우러져 사는 로자, 버려진 소년 모모 거둬 키워
로자의 마지막 지켜본 모모, 죽음 앞에 인종·세대 간 차이 아무 의미 없음을 깨닫게 돼요

여러분은 세계의 여러 문학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아마 가장 많이 들어본 상은 '노벨문학상'일 거예요. 노벨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영국의 '맨 부커상'과 프랑스의 '공쿠르상'이 꼽히죠. 이 중 프랑스의 공쿠르상(Le Prix de Goncourt)은 1903년 제정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으로, 특정 작가가 단 한 번만 상을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이 있어요.

그런데 공쿠르상을 두 번 받은 작가가 있어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쟁 영웅이자, 외교관, 영화감독, 작가로 살았던 '로맹 가리(1914~1980)'가 그 주인공이에요. 1956년 '하늘의 뿌리'라는 작품으로 공쿠르상을 받았던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쓴 소설 '자기 앞의 생'으로 1975년에 또 한 번 받아요. 이러한 사실은 로맹 가리가 죽은 후 그가 남긴 글을 통해 알려졌어요. 기존에 주어진 명성과 편견에 기대고 싶지 않았기에 새로운 이름으로 글을 썼던 것이죠. 그가 남긴 작품들의 뿌리에는 늘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권리'에 대한 목소리가 깃들어 있었지요.

[책으로 보는 세상] 당신은 누구나 차별 없이 대할 수 있나요?
/그림=이병익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 로자 아줌마는 냉정해 보이지만 정이 많은 인물로, 어릴 때부터 맡아 키운 모모에게는 보호자이자 친구 같은 존재예요. 그녀는 나치가 기세를 떨치던 시절 유대인 수용소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경험이 있는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과거로부터 불쑥 찾아오는 두려움 때문에 생필품과 먹을거리 등을 몰래 가져다 지하 유대인 피난처를 만들기도 해요. 한때는 해맑은 소녀였던 그녀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늙어가면서 늘어만 가는 살과 심장병을 얻게 됩니다. 7층 계단조차 오르내리기 버거운 생(生)이 눈앞에 닥친 것이지요.

또 다른 주인공 모모는 열 살(중·후반부에 실제 나이가 열네 살로 밝혀지지만) 소년입니다. 로자 아줌마가 생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면, 모모는 이제 막 생의 오르막 앞에 선 나이지요. 그는 버려진 아이였고 사람들의 관심을 늘 바랐지만, 무조건적 사랑에 누구보다 근접해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해요. 모모는 정해진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生)과 부딪히며 삶을 배워가요. 누구보다 진지하게 '사랑'에 대해, '삶'에 대해, '자연의 법칙'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자신만의 답을 정리해가는 영리한 소년이기도 하죠.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서면 로자 아줌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는 상황이 전개돼요. 모모는 자신을 돌봐주던 로자 아줌마가 죽으면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고민해요. 그러면서도 각종 불안에 떨며 기억을 잃어가는 로자 아줌마를 안심시키고 돌봐주지요. 소년 모모는 늙고 병들어 버린 로자 아줌마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고 절망하는가 하면, 그 어느 때보다 로자 아줌마를 더 사랑하는 성숙함을 보이기도 해요.

나는 그녀가 정신이 들도록 도와주려고 손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때만큼 아줌마를 사랑해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늙고 못생겼으며 이제 더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었으니까.


#이야기

작가 알랭 드 보통은 한 인터뷰에서 "오늘날 문화는 '딱 맞지 않는' 인간, 다시 말해 현실의 상대를 어떻게 사랑할지 방법을 찾는 데에는 소홀하면서 '딱 맞는' 상대를 찾는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이 말은 현대사회와 문화가 갈수록 '자기중심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꼬집은 것이지요. 인류는 점점 물질적으로 더 풍요해졌으나 그 과정에서 자기중심적인 문화와 인간 소외 현상을 낳았어요.

소설‘자기 앞의 생’을 쓴 작가 로맹 가리의 모습이에요.
소설‘자기 앞의 생’을 쓴 작가 로맹 가리의 모습이에요. /문학동네 제공
이렇듯 '내 입맛에 맞는' 대상만, '조건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계산된 문화 속에서는 '자격'을 갖추거나 '인정'을 받는 사람만이 존엄성과 권리를 지닌 존재로 여겨질 수 있어요.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는 세계 인권 선언 속에 쓰여 있다거나, 스스로 주장하기만 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을 나와 동등하게 여기는 생각과 행동이 모일 때 이것이 이뤄진다고 할 수 있죠.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말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정작 현실에서는 각종 조건을 먼저 내세우는 이중성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해요.

모모와 로자 아줌마가 살던 지역의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에는 유대인과 아랍인, 흑인, 이주노동자, 노인과 아이 등 다양한 인종과 세대가 한데 어우러져 살아요. 이들은 로자 아줌마의 죽음 앞에서 조건 없이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인간적으로 대하죠. 앞서 말한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삶의 현장에서 지켰던 것이지요. 모모는 그 중점에 서 있고요.

한편 로자 아줌마는 병원이 아니라 자신이 지난날 만들어 놓은 지하의 유대인 피난처에서 숨을 거둬요.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과 사람 속에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던 로자 아줌마의 바람을 모모가 이뤄준 것이죠. 죽음이라는 동정심이 없는 자연의 법칙에 대항하는 마음으로, 병든 로자 아줌마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모모는 몇 주를 시신 곁에서 보내요. 핏기 없는 얼굴에 생전 모습처럼 화장을 해주고, 각종 향수를 부어주면서 말이에요.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모모는 이제 살아갈, 자기 앞의 남은 생을 향해 던지듯 "사랑해야 한다." 고 말합니다. 생(生)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그럼에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열네 살의 생(生)을 통해 그가 깨달은 것이었으니까요.


[함께 생각해봐요]

단순히 살아 있는 기간을 늘리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보다 고통을 줄이는 완화 치료를 받으며 편안한 분위기와 사랑하는 가족 곁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면에서 더 낫다는 주장이 있어요.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떠올리며 이러한 주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세요.

박혜강 한우리독서토론논술 선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