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작전명 선더크랩, 도시의 한 구역을 날려버렸다

입력 : 2015.05.22 03:08

[블록버스터 유래]

독일 남동쪽 평화롭던 드레스덴, 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 공격받아 도시 전체 불타고 많은 희생 있었죠
거대 자본 들인 블록버스터 영화… 전쟁터의 융단폭격 연상케 해요

한낮의 뜨거운 햇볕과 함께 여름이 성큼 다가오고 있어요. 이에 발맞춰 극장가에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죠. 지난해 한강 일대에서 촬영하며 큰 관심을 끌었던 영화 '어벤져스2'는 어느새 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어요. 이렇게 큰 자본이 투자돼 순식간에 관객을 끌어모으는 영화를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불러요. 사람들은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 화면에서 느끼기 어려운 화려한 액션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죠.

때때로 이런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단기간에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 대부분의 상영관을 점령하기도 해요. '어벤져스2'의 경우 70%의 상영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상영됐다고 해요. 이는 관객들이 다른 영화를 선택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되죠. 마치 전쟁터의 융단폭격을 연상케 하네요. 그런데 블록버스터가 70년 전 독일의 드레스덴을 초토화했던 폭탄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1945년 2월 13일 작전명 선더크랩이라고 불리는 드레스덴 폭격.
1945년 2월 13일 작전명 선더크랩이라고 불리는 드레스덴 폭격. 극장가를 휩쓸 정도의 흥행 영화를 일컫는‘블록버스터’라는 용어는 이 작전에서 비롯됐어요. /위키피디아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 대륙을 휩쓸고 다니던 독일은 영국을 상대로 대규모 공습을 벌여요. 런던이 불바다가 된 다음 영국은 독일을 응징하기 위해 초대형 폭탄 만들기에 몰입했어요. 일반적인 폭탄이 1t 내외였다면, 1.8t에서 5.4t에 이르는 거대한 폭탄이 이때 제작됐죠. 폭약의 양과 비율이 높아서 큰 파괴력을 갖기 때문에 일명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고 불렀지요. 도로로 경계가 나뉘는 도시의 한 구역을 뜻하는 'block'과 송두리째 날려버린다는 의미의 'bust'가 합쳐진 말이에요. 하나의 블록을 몽땅 날려버릴 만큼의 위력을 가진 굉장한 폭탄이라는 뜻이에요. 폭격기에 실린 블록버스터는 연합국의 대표 무기가 돼 활약하게 돼요. 뒤늦게 연합군으로 합류한 미국과 함께 영국은 독일의 서쪽에서 압박했어요. 반대편 동쪽에서는 또 다른 연합군인 소련이 독일을 조여오고 있었죠. 독일의 패배는 사실상 시간문제였어요.

독일의 패배가 점쳐지던 1945년 2월 13일, 영국군 아서 해리스의 지휘 아래 진행된 선더크랩 작전. 영국에서 출발한 랭커스터 폭격기 떼가 열을 맞춰 향한 곳은 독일 베를린 남쪽 200여㎞에 있는 드레스덴이었어요. 아름답고 유서 깊은 건축물에 둘러싸인 이곳은,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에도 폭격을 받지 않은 평화로운 도시였죠. 그러나 흐린 밤하늘을 뒤덮은 폭격기에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4.5t의 거대한 블록버스터 폭탄이 검은 비처럼 쏟아져 내렸어요. 흡사 드럼통처럼 보이는 고성능 폭탄들이 오래된 시가지 한복판에 떨어졌죠. 거대한 폭발음이 도시를 집어삼킨 자리에 뒤이어 소이탄의 불꽃이 파고들었어요. 소이탄은 숲이나 군사시설을 불태우기 위한 폭탄으로 1000℃에서 3000℃까지 온도가 올라가며 불 폭풍을 몰고 오는 무서운 무기였어요. 나중에 베트남전에서 사용된 네이팜탄도 유사한 종류였죠. 촘촘하게 융단을 짜듯 어느 한 부분도 빠짐없이 폭격이 계속됐어요. 두 가지 폭탄이 만든 불기둥이 도시를 뒤덮었어요. 폭격기가 나는 상공에서도 그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해요.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사람들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었어요. 불길을 피해 방공호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질식해서 숨졌죠.

(위)영국 공군이 2차 대전 시기 사용했던‘블록버스터’폭탄. (아래 왼쪽)영국군의 폭격으로 도시 자체가 폐허가 되어버린 1945년 독일 드레스덴의 풍경. (아래 오른쪽)2차 세계대전이 있기 전, 1890년대의 드레스덴 모습이에요.
(위)영국 공군이 2차 대전 시기 사용했던‘블록버스터’폭탄. (아래 왼쪽)영국군의 폭격으로 도시 자체가 폐허가 되어버린 1945년 독일 드레스덴의 풍경. (아래 오른쪽)2차 세계대전이 있기 전, 1890년대의 드레스덴 모습이에요. /조선일보 DB·위키피디아
3시간 뒤에는 또다시 2차 폭격이, 다음 날인 2월 14일에는 미군의 폭탄 세례가 이어졌어요. 기상 악화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무차별적인 총격도 이뤄졌어요.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은 파괴되거나 불에 타 시커멓게 그을렸어요. 약 3만5000명 이상의 시신이 수습됐고, 당시 독일의 나치당에서는 2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했죠. 사망 인원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축소나 과장이 있기 때문이지만, 그만큼 인명 피해가 컸다는 뜻일 거예요. 블록버스터 폭탄의 융단폭격으로 드레스덴은 철저하게 파괴됐어요. 블록버스터나 융단폭격이라는 말은 이런 전쟁 과정에서 유래했죠. 독일의 많은 도시가 같은 방법으로 파괴되었지만, 드레스덴만큼 민간인이 많이 희생된 곳은 없었어요.

작전을 이끌었던 아서 해리스는 드레스덴을 초토화한 이유에 대해서 군수시설이 있었으며, 교통의 요지로서 독일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였을까요? 궁지에 몰린 히틀러는 그해 4월 30일, 자살했어요. 그리고 5월 2일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이 함락됐고, 5월 8일에는 결국 독일이 항복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어버이날인 5월 8일이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일이랍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드레스덴 폭격에 대해서 민간인 대학살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어요. 실제로 군수시설은 외곽에만 일부 존재했을 뿐이며,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한 방편으로 무차별적 희생을 감행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이유야 어쨌든 민간인의 대량 희생을 가져온 것은 비윤리적이니까요.

공미라 세계사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