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교과서 여행] 해발 500m에 쌓아올린 성… 병자호란의 슬픈 역사 간직하고 있어

입력 : 2015.04.29 03:08

[117] 남한산성

봄을 맞아 등산객으로 붐비는 곳 중 남한산성을 빼놓을 수 없어요.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남한산성은 해발 500m에 달하는 남한산에 쌓은 성이에요. 산성 전체 길이는 11.76㎞, 면적은 2.3㎢죠. 남한산성을 만나고자 산을 오르면, 지금처럼 기계가 없던 옛날에 어떻게 이렇게 높은 곳에 성을 쌓을 수 있었는지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지죠.

남한산성에 들어서면 지금까지 지나온 꼬불꼬불 산길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평하고 넓은 마을이 나와요. 지금은 음식점이 즐비하지만, 옛날에는 임금이 머물렀던 행궁과 군사 시설, 도시 기능을 갖춘 곳이었죠. 이곳은 넓고 평탄한 데다 우물 80여개와 연못 45개가 있어 식량만 있으면 수만 병력도 너끈히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해요. 올라오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이 안에 들어오면 안심인 이유죠. 그래서 옛날부터 이곳은 천혜의 요새였답니다. 남한산성은 이런 입지적 조건에 오랜 세월 지은 다양한 형태의 성곽과 건축술 등으로 지난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죠.

북한산성과 함께 조선 시대의 도성인 한양을 지키던 남한산성 모습이에요. 산세를 따라 굴곡진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지요.
북한산성과 함께 조선 시대의 도성인 한양을 지키던 남한산성 모습이에요. 산세를 따라 굴곡진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지요. /변희석 기자

남한산성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인물이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입니다. 남한산성이 지금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인조 2년 때였죠. 광해군 13년에 후금의 침입을 막느라 돌로 성을 쌓기 시작했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중단됐어요. 그러다 인조 때 들어서 본격 공사를 다시 시작한 거죠. 공사가 시작된 지 2년 후인 1626년에 남한산성의 본성이 완성되자, 광주목(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에 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을 성 안으로 옮겨오고 행궁도 지었죠.

성을 쌓은 가장 큰 이유는 외적 침입에 대비하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인조 14년에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이 조선을 쳐들어오죠.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에요. 인조는 왕자 등 가족을 강화도로 피란시키고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요. 인조는 군사들과 이곳에서 45일간 청나라와 대항해서 싸워요. 그러나 식량은 떨어지고 막강한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까지 점령하자 결국 항복하고 말죠.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는 청나라의 요구에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항복 의식을 치러요. 청나라는 죄인이 용포, 즉 왕의 옷을 입을 수 없다 해서 인조에게 청색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명령하죠. 또한 죄인은 정문으로 통과할 수 없다 해서 남한산성의 서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나오라고 시켰어요. 그리고 삼전도에서 인조는 청나라 태종에게 신하의 예를 갖춰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해야만 했어요. 태종은 조선이 항복한 것을 기념해 비석을 세우라고까지 했는데, 그것이 바로 석촌호수에 있는 삼전도 비석이에요. 남한산성에서 인조대왕과 병자호란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겠죠?

남한산성에는 인조가 세자와 함께 내려간 서문을 비롯해 동문, 남문, 북문 등 네 문이 있어요. 성문 밖은 험하고 거친 산길이, 성문 안쪽으로는 잘 닦이고 정돈된 길이 대비를 이루고 있어 묘한 느낌이 나요. 능선과 산세를 활용해 아름답게 지은 산성 밖으로 멀리 서울 시내와 한강도 보이죠. 아픈 역사 때문일까요? 그 아름다움이 때로는 슬프게 보이기도 한답니다. 

[1분 상식] '행궁(行宮)' 이란 무엇인가요?

임금이 궁궐을 벗어나 밖으로 나갔을 때, 임시로 머무는 궁을 말해요. 조선 시대 때 사용한 행궁으로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등 20여개가 있어요.

남한산성 행궁은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두고 있죠. 인조 외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임금도 여주나 이천에 있는 능에 갈 때 남한산성 행궁에 머물렀다고 해요.

임후남·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