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헤이그 특사와 함께했던 '한국 사랑 미국인'

입력 : 2015.03.23 03:27

고종의 외교 자문관 호머 헐버트, 美 대통령·정치인도 만나러 가 을사늑약의 부당함 호소했답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으나 광복 후 방한해 한국 땅에 묻혔어요

지난 3월 5일,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괴한에게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어요. 마크 리퍼트 대사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한 미국인으로 알려져 많은 국민이 이를 안타까워했죠. 다행히 그는 입원한 지 5일 만에 병원에서 퇴원했고, SNS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변함없음을 알려 국민에게 큰 감동을 줬죠. 그런데 대한제국 시기에 리퍼트 대사처럼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했던 한 미국인이 있었어요. 그의 이름은 호머 헐버트. 사람들은 그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이라 불렀지요. 그의 한국 사랑이 어떠했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을까요?

◇대한제국의 억울함을 호소하려 미국으로

1905년.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을사늑약을 맺으며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기게 돼요. 이에 고종 황제는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의 억울함을 미국에 호소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호머 헐버트를 불러 조용히 말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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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창우

"여기 일제가 불법과 강제로 맺게 한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문서를 직접 작성했소. 그대가 이 문서를 미국의 대통령에게 전해주시오."

"물론입니다. 제가 미국으로 가서 이 문서를 미국 행정부에 전하겠습니다."

"조선의 운명이 그대 손에 달렸소. 그대만 믿겠소."

고종 황제의 비밀문서를 받은 헐버트는 미국으로 향했어요. 그리고 미국에서 미국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만나 을사늑약의 무효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려 했죠.

◇"을사늑약은 무효입니다"

그러나 제국주의 길로 들어선 미국은 동방의 작은 나라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어요. 헐버트는 미국 국무부에 대한제국의 안타까운 현실을 알리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미국 국무부는 고종의 친서 접수마저 거부하고 말죠.

"미국은 한국의 애절함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헐버트는 미국의 정치인들을 만나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대한제국의 문제를 호소했어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한국의 주권을 통째로 일본에 넘겨줬습니다. 한국을 일본에 넘긴 것은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가 아니라 우리 미국입니다."

이런 호소에도 누구 한 명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한국의 문제에 앞장서지 않았어요. 이미 미국은 일본과 은밀하게 약속을 맺었기 때문이죠. 그 약속은 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서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에요. 이를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고 불러요.

◇대한제국의 억울함을 세계에 알리려 헤이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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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헐버트가 다시 고종 황제와 만나 대한제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이야기를 나눴어요.

"황제 폐하. 곧 네덜란드라는 국가의 헤이그라는 도시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고 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 외교관들이 참가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이곳에 특사를 보내 을사늑약에 대한 대한제국의 억울함을 호소하면 어떨까요?"

"오! 좋소."

고종은 헐버트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국인 3명을 헤이그에 파견했어요. 이준·이상설·이위종이 바로 헤이그에 간 특사지요. 헐버트는 한국 특사들보다 먼저 헤이그로 갔어요. 그곳에서 언론에 일제의 침략에 억울해하는 대한제국의 입장을 호소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고, 뒤이어 도착한 특사들을 도와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노력했죠. 이후 헐버트는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로도 활약하다 일제의 미움을 받아 한국에서 강제 추방을 당하고 말았어요.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헐버트는 미국 버몬트주(州)에서 태어나 1886년 23세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았어요. 조선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교사로 있으면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고종의 외교 자문관으로 활약했죠. 한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해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세계 지리와 문화를 소개한 교과서를 한글로 지었으며, 한글의 우수성을 외국에 소개하기도 했어요. 우리 민요 아리랑의 영문 가사와 악보를 외국에 소개하며 "한국인에게 아리랑은 쌀과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대요.

명성황후가 일본인들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서 고종이 불안해할 때는 언더우드 등 미국 선교사들과 교대로 고종을 곁에서 지키기도 했어요. 일제에 의해 한국에서 강제 추방을 당하고 나서는 미국에 돌아가 일제를 비판하고 3·1운동을 지지하기도 했죠.

헐버트는 한국을 떠난 뒤 약 40년 만인 1949년에 다시 한국 땅을 찾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숨을 거두고 말아요. 그리고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자신의 유언대로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어요.

[함께 생각해봐요]

대한제국 시기에 호머 헐버트와 더불어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서양인 독립운동가가 있어요. 헐버트와 함께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영국 출신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이에요. 그의 한국 사랑, 그가 한국 역사에 끼친 업적 등을 알아봅시다.



 

지호진·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
감수=조규태 교수(한성대 역사문화학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