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책으로 보는 세상] "34년을 열심히 일했는데… 이젠 필요없다니"

입력 : 2015.03.11 03:07

[57]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왕년에 잘나갔던 세일즈맨 윌리… 1929년 美 경제 대공황 오자 해고돼
평생 물질적 가치관 추구한 주인공… 위기 못 이기고 극단적 최후 맞아요

'고용 유연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최근 각계각층에서 이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답니다. 고용 유연화란 기업이 경기 변동이나 시장 상황 등에 따라 노동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뜻해요. 기업의 경영 환경이나 국제 경쟁력 측면에서 볼 때 고려해 봐야 할 문제이지요. 노동을 유연하게 조절하기 위해서는 고용과 해고를 손쉽게 할 수 있어야 해요. 또 정규직을 줄이고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을 높여야 하죠. 만약 이게 현실이 된다면 노동자 입장은 어떨까요? 이렇게 될 경우 노동자들은 언제 회사를 그만두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에 빠질 거예요.

현재 우리나라의 고용 상황을 보면, 청년 실업 문제와 비정규직 차별 문제가 심각한 상태입니다. 실질적인 퇴직 연령도 빨라지는 추세고요.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고용 유연화 정책을 추진한다면 많은 이가 고용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오늘 소개할 작품 속 주인공 윌리 로먼처럼 말이에요.

[책으로 보는 세상]
/그림=이병익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인 윌리 로먼은 한때 잘나가던 세일즈맨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이가 들어 출장을 다니는 것조차도 힘겨워하죠. 윌리는 사장에게 출장을 다니지 않고 뉴욕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해고 통지였어요.

저는 이 회사에서 삼십사 년을 봉직했는데 지금은 보험금조차 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오렌지 속만 까먹고 껍질은 내다버리실 참입니까! 관심을 좀 기울여 주세요. 사장님 아버지는…. 1928년에 저는 큰 성공을 거두었어요. 주당 평균 커미션만 170달러에 달했으니까요.

이렇게 간곡한 애원에도 윌리는 34년간 열정을 바쳐 일한 직장에서 알맹이만 먹고 미련 없이 버려진 과일 껍질처럼 쫓겨나고 말지요. 윌리는 현재의 젊은 사장인 하워드의 아버지와 함께 회사를 키웠고 하워드의 탄생까지 지켜본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하워드에게 윌리는 회사의 이익을 달성하는 수단일 뿐 그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던 것이죠. 자신이 판매한 물건의 가치만큼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세일즈맨 윌리 로먼의 모습은 바로 이 시대 수많은 노동자를 떠올리게 하지요.

한편 윌리가 점점 낮은 실적을 기록한 것은 비단 나이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그가 큰 성공을 거뒀다고 말하던 시절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경제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형성된 엄청난 자금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부동산과 주식시장에 몰려들면서 경제구조가 위태로워졌어요. 결국 1929년 10월 미국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이를 경제 대공황이라고 하는데, 대공황의 시작과 함께 윌리의 좋은 시절도 끝난 셈이지요.


#이야기

세계 대공황 당시 미국 시카고의 모습이에요. 작품 속 윌리처럼 해고된 사람들에게 무료로 빵과 커피를 나눠 주는 음식점 앞에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네요.
세계 대공황 당시 미국 시카고의 모습이에요. 작품 속 윌리처럼 해고된 사람들에게 무료로 빵과 커피를 나눠 주는 음식점 앞에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네요. /위키피디아
윌리에게는 비프와 해피라는 두 아들이 있었어요. 윌리는 그들이 훗날 최고의 세일즈맨이 되기를 바랐지요. 그래서 착실하게 공부하기보다는 남들에게 호감을 주며 인기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심지어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야단을 치지 않고 별일 아니라며 모른 체하곤 했지요. 윌리는 성실과 노력보다 준수한 외모로 허세를 부리며 남들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 세일즈맨으로 성공하는 비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어요. 두 아들 모두 성공은커녕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로 방황했죠. 윌리는 자신과 아이들의 절망적인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 속에 빠져들어 불편한 현실을 회피했어요.

모든 부모가 그렇듯이 윌리도 두 아들이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윌리는 경제적인 성공만이 행복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졌는지, 어떤 일에 보람을 느끼는지, 어느 정도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죠. 윌리 가족의 불행은 이렇게 비뚤어진 그의 가치관이 만들어낸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더는 현실을 바로 볼 용기도, 가족을 부양할 능력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윌리는 가족들에게 보험금이라는 마지막 희망을 남겨주기 위해 자살을 택합니다.

오늘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어요. 오늘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 이제 우리는 빚진 것도 없이 자유로운데. 자유롭다고요. 자유롭다고요. 자유….

윌리의 아내 린다의 마지막 대사입니다. 물질적 가치를 위해 평생을 전전긍긍하다 결국에는 자기 자신마저 팔아버린 세일즈맨의 최후가 안타깝게 느껴지네요. '세일즈맨의 죽음'은 책으로도 널리 읽히지만, 초연된 지 6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세계 각지의 무대에서 상연된다고 해요. 그것은 어쩌면 여전히 현실 속에 수많은 윌리 로먼이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함께 생각해봐요]

윌리의 가족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요? 책 내용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상상해보세요.

최혜정 한우리독서토론논술 수석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