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리더
평생 봉사하며 살기 위해… 의사가 된 '아프리카의 성자'
[53] 알베르트 슈바이처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하는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는 평생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희망을 준 위대한 의사입니다. 그는 독일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는 자기가 가난한 친구들보다 배불리 먹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들과 함께하기 시작했죠. 좋은 옷을 거부하고 낡은 옷을 입으며 친구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생활했어요. 또한 슈바이처는 어릴 때부터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죽이지 않고 살려줬어요. 이런 슈바이처의 성격은 그가 평생을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칩니다.
- ▲ 슈바이처는 전 생애 동안 아프리카 정글이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원주민들을 치료해주고 사랑을 베풀었지요. 그의 노력과 끈기 그리고 봉사 정신은 많은 이에게 본보기가 된답니다. /Corbis/토픽이미지
언젠가는 꼭 남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슈바이처는 열심히 공부해 철학과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스물일곱 살부터는 스트라스부르 대학 신학부 강사로 근무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콩고 지방의 선교회장 뵈그너가 쓴 글을 접하게 돼요. 무서운 질병과 맹수의 공격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선교 활동을 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죠. 글을 본 순간, 슈바이처는 예전의 다짐이 떠올랐죠. 그리고 아프리카로 가서 원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을 돕기 위해 의학 공부도 시작하죠.
주변의 반대에도 1913년,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로 향했습니다. 랑바레네에 도착한 슈바이처는 본격적 의료 활동을 시작했어요. 랑바레네는 전염병과 홍수 등이 빈번해 살기 어려운 곳이었죠. 그 때문에 제대로 된 진료소를 구하지 못해 닭장을 수리한 가건물에서 진료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뜨거운 아프리카 태양 때문에 일사병이 만연했지요. 병을 옮기는 체체파리가 수시로 건강을 위협했으며, 의약품과 의료용품 부족도 진료를 방해했죠. 그러나 더더욱 힘든 것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적대감이었습니다. 백인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원주민들은 백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슈바이처의 진심은 원주민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은 점차 슈바이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기 시작했죠.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서 의료 활동을 펼친 지 일 년쯤 됐을 때,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어요. 특히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전쟁의 여파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랑바레네까지 미치게 됐죠. 독일 국적이었던 슈바이처의 병원은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고, 슈바이처는 사택으로 옮겨져 감금당했습니다. 병원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죠. 그런 과정에서 그는 '생명 경외 사상'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슈바이처는 제1차 대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나서, 랑바레네에 7년 만에 돌아갈 수 있었죠. 랑바레네의 병원은 폐허가 됐지만, 슈바이처는 낙담하지 않고 다시 병원을 세워 진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슈바이처와 뜻을 같이하겠다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합류하면서 병원은 점점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병원 규모도 점점 커졌습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도 병원은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 사람에 대한 슈바이처의 순수한 봉사 정신은 전 세계를 감동시켰고, 그는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됩니다. 그의 박애 정신은 오늘날에도 영원한 등불처럼 타오르고 있죠.
[1분 상식] 슈바이처가 말한 '생명 경외 사상'이란?
슈바이처는 모든 생명은 거룩하며, 희생되어도 되는 생명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를 ‘생명에 대한 경외’라고 표현하며 ‘나의 생애와 사상’이란 책에서 주장했지요. 슈바이처는 모든 생명은 살아갈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므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