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세상
"근대화에 뒤처진 나, 조선 현실처럼 서글프구나"
[49] 이태준 '패강랭'
옛것 간직하고 싶은 주인공 '현'
친구 '김'이 新문물 받아들이라 해도 현실 적응하지 못한 채 방황하죠
일제시대 때 이뤄진 근대화 모습, 평양의 세 친구들 통해 그려냈어요
- ▲ 휴대전화가 나오기 전, 많은 사람이 이용한 '삐삐'예요.
여러분은 '삐삐'가 무엇인지 아나요? 휴대전화가 나오기 전 많은 사람이 사용한 무선호출기랍니다. 삐삐는 1990년대 크게 유행하였는데, 작은 화면에 발신자의 전화번호 같은 아주 짧은 메시지만 표시할 수 있는 장치였지요. 사람들은 숫자로 된 짧은 언어를 만들어 간단한 의사표현을 하기도 했답니다. '8282(빨리빨리)'처럼 말이에요. 여러분 부모님께도 한번 여쭤보세요. 아마 삐삐에 얽힌 재미있는 추억담을 들려주실 거예요. 하지만 한때 많은 사랑을 받은 삐삐는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답니다.
지금보다 훨씬 앞선 1930년대 서양 문물이 밀물처럼 들어오며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진 시기가 있었어요. 이를 '근대화'라고 불렀지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작품 '패강랭'은 근대화를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주인공 '현'은 옛것에 대한 향수를 가진 사람이에요. 현은 오랜만에 친구 '박'을 보기 위해 평양에 왔지요. 하지만 평양은 예전 자신이 알던 곳이 아니었어요. 빌딩이 늘고, 여자들의 머릿수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현은 조선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을 무척 아쉬워해요. 게다가 이 모든 변화가 '일제의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조선 땅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에 나라 잃은 백성의 서글픔마저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의 흐름을 잘 이용한 또 다른 친구가 등장합니다. 현과 박은 동일관이라는 기생집에서 친구 '김'을 만나요. 김은 현과는 달리 전통적 가치를 구시대적 유물로 취급합니다. 근대화가 최고이며 돈과 권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지요. 김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을 보며 이제라도 실속을 차리라고 충고합니다. 변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 앞으로는 밥 벌어먹기 어려울 것이라며 현에게 뼈 있는 한마디를 남기지요. 현은 근대화라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과 너무도 빨리 변하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바람은 없으나 등골이 오싹해진다. 강가에 흩어진 나뭇잎들은 서릿발이 끼쳐 은종이처럼 번뜩인다. 번뜩이는 것을 찾아 하나씩 밟아 본다.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 주역(周易)에 있는 말이 생각났다. 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얼음이 올 것을 각오하란 말이다. 현은 술이 확 깬다. 저고리 섶을 여미나 찬 기운은 품속에 사무친다.
- ▲ 그림=이병익
현의 머릿속에 생각난 '이상견빙지'는 어떤 의미일까요? 무더운 여름이 엊그제 같지만, 찬 서리를 밟는 순간 겨울이 다가옴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현은 지금의 상황이 '서리'라면, 앞으로 일어날 일은 '얼음'과 같다는 것을 예감합니다. 그는 김의 말과 평양의 변화를 보며 이제 곧 닥쳐올 암울한 조선의 앞날을 예상하지요. 근대화에 뒤처진 자신의 모습과 조선의 현실이 겹치며, 현은 한없는 서글픔을 느낀 것이에요.
이 작품의 저자는 이태준입니다. 그는 강원도 철원 출신으로 1921년 휘문고보에 입학했으나, 동맹휴교를 주동하였다는 이유로 퇴학당했어요. 이후 일본 도쿄의 조치대학에 들어갔지만 중퇴하고 귀국하였지요. 광복 이전에 쓴 작품에서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인간 세계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자세로 단편소설의 서정성을 높이고, 예술적 완성도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지요. 광복 이후에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작품에 담고자 노력하였다고 하고요. '돌다리' '오몽녀' '복덕방' 등이 그의 대표작입니다.
이태준은 1938년 발표한 '패강랭'에서 새로운 변화보다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주인공 현을 등장시켜요. 현을 통해 사라져가는 전통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문물에 대한 두려움을 복합적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한편 주인공의 친구인 박과 김은 전통보다는 변화를 추구하는 인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야기
혹시 '디지로그(digilog)'라는 말을 들어봤나요? '디지털(digital)'과 '아날로그(analog)'를 합친 말로, 아날로그 사회에서 디지털 사회로 옮겨가는 과도기, 또는 디지털 기기와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된 첨단기술을 의미하는 말이에요. IT를 기반으로 '우정' '공동체' '연대의식' 등 아날로그적 감성이 더해지면서 등장했지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다수의 개인으로부터 투자금을 모으는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은 디지털 기술과 전통문화인 품앗이가 결합한 형태이며, 최대 30년 후까지 기간을 설정해 모바일로 편지를 보내는 한 통신사의 서비스 역시 디지털 기술과 전통적 정서를 융합한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러한 현상은 스마트 시대에 사는 많은 현대인이 아직 전통적인 정서와 감성에 향수를 느끼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유행' '경향'이라는 뜻의 외래어 '트렌드(trend)'는 말 그대로 많은 사람이 무엇을 따르고 즐기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처음에는 사회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작은 물결 같은 모습을 보이지요. 현재 사회나 문화에 잘 맞는 유행은 점차 커져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큰 파도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어느 순간 사그라지고 맙니다. 요즘 사회는 '패강랭' 속 세상보다 더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수많은 유행이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고, 그 틈바구니에서 전통적 가치도 설 자리를 잃고 있지요. 시대 변화에 유연하고 현명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작은 물결이 아닌 커다란 흐름을 볼 줄 아는 혜안(慧眼)을 길러야 합니다. 또한 앞으로 오랫동안 지켜야 할 우리 전통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겠지요?
[함께 생각해봐요]
우리의 전통문화 가운데 지키고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또한 이러한 전통적 가치를 지킬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