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여행
붓 1000자루 닳도록 쓴 추사의 얼, 유배지에 서려 있네
[107] 제주 추사 유배지
우리나라 서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 질문에 많은 사람이 가장 먼저 추사 김정희(1786~1856)를 떠올릴 거예요. 추사 김정희는 '학예일치(學藝一致)' 즉 학문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오늘은 김정희가 8년 3개월간 유배 생활을 한 제주도로 가볼 거예요. 그는 이곳에서 벼루 10개가 닳고, 붓 1000자루가 몽당붓이 되도록 글씨를 썼다고 하지요. 그리고 자기만의 글씨체인 '추사체'를 완성하고,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歲寒圖)'〈위 사진〉를 그렸습니다.
세한도는 세로 23㎝, 가로 61.2㎝의 작은 그림으로, 잣나무와 소나무, 작은 집 한 채를 담았습니다. 김정희는 유배당한 자기를 잊지 않고 귀한 책을 보내준 역관 이상적을 위해 1844년 세한도를 그렸다고 해요. '세한도'라는 이름은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게 된다'는 논어 구절에서 따왔지요. 어려운 상황에 처한 후에야 진정한 벗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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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한도 속 집을 모티브로 하여 지어진 추사관이에요. 건물에 난 동그란 창이 그림과 똑 닮았지요? /사진=임후남·위키피디아 제공
이상적은 '세한도'를 청나라에 가져가 문인들에게 보여주었어요. 당시 청나라 문인들은 김정희와 이상적의 우정에 감탄하고, 김정희의 글씨체와 그림에 놀라며 그에 대한 감상문을 적어주었지요. 여기에 이상적이 감상문을 받게 된 경위를 덧붙이고, 훗날 근현대에 이르러 독립운동가였던 이시영, 오세창, 정인보 등이 감상문을 또 적어 붙여 현재 세한도의 길이는 14m나 된답니다.
추사 김정희의 집안은 조선시대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어요.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 임금의 사위였고, 아버지 김로경은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의 최측근이었지요. 김정희는 여섯 살 때부터 글을 잘 쓰기로 유명하였다고 해요. 24세 때는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북경에 가서 많은 학자와 교류하였지요. 이후 서른 살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르지만, 뜻을 다 펼치지 못한 채 당파 싸움에 휘말려 제주도로 귀양 갔어요. 김정희는 이곳에서 한양으로 돌아가길 바라며, 글을 쓰고 학문을 연마하였다고 해요.
지금 추사 유배지에 있는 초가는 4·3항쟁 때 불탄 것을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에요. 그 앞의 제주 추사관도 기존 추사유물전시관을 2010년에 재건립하였지요. 제주 추사관은 세한도에 나오는 집을 모티브로 하여 단아하고 강직한 느낌을 줍니다. 특히 가운데 난 동그란 창은 세한도의 집과 똑같아요. 건축가 승효상씨가 설계하였는데, 새로 지은 건물인데도 초가와 마을, 대정성벽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건물이랍니다. 그 밖의 추사 유적지로는 추사가 태어나고 자란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 유배에서 풀려나 말년을 보낸 경기 과천의 추사박물관 등이 있습니다.
[1분 상식] '역관'은 어떤 사람인가요?
역관(譯官)은 고려·조선 시대에 통역·번역 등을 담당한 관리예요. 주로 중국·왜(일본)·몽골·여진과의 외교에서 통역 업무를 맡았지요. 역어지인(譯語之人), 설인(舌人), 상서(象胥) 등으로도 불렸어요.
역관은 중국 등을 오가며 학문을 넓히고 무역 활동에 뛰어들어 많은 수입을 거뒀지요. 지식·경제력 측면에서 양반 계층에 뒤지지 않았으나, 늘 중인 계급으로 대우받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고 해요. 그래서 조선 후기 신분 해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근대화 흐름을 주도적으로 이끌기도 하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