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세상
청년이 절망하는 사회, 이대로 괜찮을까?
[44] 현진건 '술 권하는 사회'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 남편, 아무 일도 못 하고 매일 술만 마셔
아내의 원망에 "사회가 술 권한다"
좌절·방황 겪는 식민지 지식인… 취업난 시달리는 요즘 청년과 닮아
최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인문계열 대학생 10명 가운데 4명이 '(대학) 전공이 진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고 해요. 인문계열 대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전공보다 영어 공부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상황이고요. 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특기가 영어'라는 웃지 못할 유머도 생겼다고 합니다. 국문과를 졸업하고도 취업을 위해 토익 공부를 해야 하는 형국이지요. 누가, 또는 무엇이 이들에게 취업하고 싶으면 영어를 공부하라고 강요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작품에도 취업하지 못해 고민인 주인공 남편이 나옵니다. 1920년대나 지금이나 고학력 지식인의 취업은 쉽지 않은가 봐요. 더구나 주인공 남편은 결혼까지 했으니 그 마음의 짐은 또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부부는 결혼한 지 8년 가까이 되었지만, 결혼 후 남편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기에 함께한 날은 1년도 채 되지 않아요. 부인은 오매불망 남편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온갖 고생을 참아냅니다. 그리고 남편이 한다는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으로 생각하지요. 마치 한 번 땅에 두드리기만 하면 금은보화가 쏟아지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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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이병익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남편은 돈을 벌어오기는커녕 집안의 돈을 갖다 쓰며 분주히 돌아다니기만 해요. 남편이 돌아오면 금방이라도 잘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아내는 한량과 다를 바 없이 술만 마셔대는 남편이 원망스럽지요. 그러나 남편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과 갈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김없이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온 남편에게 참고 참았던 아내가 묻습니다. '누가 이렇게 당신에게 술을 권하느냐'고요. 이 물음에 남편은 '바로 이 사회라는 것이 술을 마시게 한다'고 말해요. 그러고서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답답한 마음에 자신을 막는 아내를 밀치고 밖으로 나가 버립니다.
쓸쓸한 새벽바람이 싸늘하게 가슴에 부딪친다. 그 부딪치는 서슬에 잠 못 자고 피곤한 몸이 부서질 듯이 지긋하였다. 죽은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해쓱한 얼굴이 경련적으로 떨며 절망한 어조로 소곤거렸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주인공의 남편은 왜 '이 사회가 술을 권한다'고 말했을까요? 남편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조선의 최고 지성인 중 하나입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많은 꿈과 기대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을 현실은 받아주지 않았어요. 분주히 돌아다니며 나름의 노력을 해봤지만,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요. 이 작품은 자신의 꿈을 실현해 보고자 노력하지만,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혀 그저 술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지식인의 아픔과 고뇌, 좌절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의 저자는 우리가 잘 아는 '운수 좋은 날' '빈처' 등을 쓴 현진건이에요. 그는 이 작품 속 주인공 남편처럼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과 그에 대한 불만, 경제적 어려움 등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지요. 그리고 실제로도 현진건은 술을 좋아했다고 하고요. 작품 속 주인공 남편에게 그러했듯이, 술은 당시 식민지 시대를 살던 지식인의 유일한 낙이자 도피처였을 거예요. 현진건은 1920년 '희생화(犧牲花)'를 발표하여 작가로서 나서기 시작하였고, '빈처(貧妻)'로 이름을 알렸어요.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 근대문학 초기 단편소설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하였지요. 특히 식민지 시대 현실 문제를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로 표현하여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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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5월 서울 광진구 건국대에서 열린 채용설명회 모습이에요. 대학생들이 어학연수, 자격증, 공모전 수상 등 과도한 스펙을 요구하는 사회·기업을 향해 “스펙보다 사람을 봐 달라”고 말하고 있어요. /주완중 기자
우리는 이 작품을 보면서 무능한 남편을 탓하는 아내와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술로 자신을 위로하는 남편을 모두 이해할 수 있어요. 더구나 이 작품이 쓰인 9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젊은 지식인이 처한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지요. 대학 졸업만으로 취업이 가능했던 것은 이미 옛날이야기가 되었어요. 지금은 대학 졸업장에 갖가지 화려한 경력을 덧붙이는 '스펙 전쟁'이 보편화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이 OECD 국가 중 '1위'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야기
요즘 젊은이 사이에서는 '열정 페이'라는 말이 유행이라고 해요. 정규직으로 일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 버린 시대에 인턴이나 비정규직 또는 자원봉사 수준의 일자리가 많아졌습니다. 당연히 보수도 적거나 거의 없다시피 하지요. 열정 페이는 "너희는 '열정'이 있으니 적은 페이(pay·월급)를 감수하라"는 식의 요즘 세태를 비꼰 말이에요. 그만큼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설 자리가 부족하다는 뜻이지요. 또한 이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열정'이라는 이름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작품 속 방황하는 남편의 모습은 취업 전선에서 힘겨워하는 우리 시대 청년들과 어느 정도 닮았습니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당시 지식인의 고뇌를 담아내고자 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도 청년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지 지금부터라도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함께 생각해봐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권하고 (또는 강요하고) 있나요? 그리고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