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아편전쟁, 홍콩을 영국에 넘기다

입력 : 2014.10.17 05:25 | 수정 : 2014.10.17 15:46

[홍콩과 아편전쟁]

英, 무역 불균형 해결 위해 아편 수출
아편전쟁에서 청나라에 승리한 후 1842년 난징조약 맺어 홍콩 빼앗아
1997년 중국에 반환된 홍콩, 외교·국방 제외 50년 자치 허용받아

요즘 노란 우산을 쓴 홍콩 시민이 뉴스에 자주 등장해요. 비도 오지 않는데 이들이 우산을 들고 나선 이유는, 중국에 속했으면서도 중국과는 다른 홍콩을 지키기 위해서랍니다. 이들의 시위는 경찰이 쏜 최루탄을 우산으로 막아내 '우산혁명'이라고도 불려요. 시위에 나선 홍콩 시민은 중국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난 '홍콩의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지요. 사실 그동안 홍콩은 중국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곤 했습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속했지만, 외교·국방을 제외한 나머지 제도는 자율적으로 운영해요. 그렇다면 홍콩은 왜 중국과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요?

영국은 중국의 아편 단속을 빌미로 아편전쟁을 일으켰어요. 이 전쟁은 최신식 화기와 증기선을 가진 영국 함대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지요
영국은 중국의 아편 단속을 빌미로 아편전쟁을 일으켰어요. 이 전쟁은 최신식 화기와 증기선을 가진 영국 함대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지요. / 위키피디아
19세기,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양의 여러 나라는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판매할 시장을 찾아 아시아에 진출하였어요.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청나라는 드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 풍부한 자원을 가져 남부러울 게 없었지요. 청나라 황제가 "중국에는 무엇이든 다 있기 때문에 무역이 필요 없다. 필요하다면 교류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오랑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고 말했을 정도예요. 서로 사고파는 무역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중국에 은을 주고 물건을 사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중국의 차(茶)를 마시는 것이 일상생활이 된 영국의 문제가 가장 심각했어요. 당시 어마어마한 양의 은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흘러들어 갔거든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였어요. 중독성이 강한 마약의 일종인 아편이 중국에 들어가면서 무역의 흐름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에 아편 중독자가 점점 늘어나 19세기 중반 약 4만 상자의 아편이 수입되었지요. 학자들은 당시 중국에 400만명가량의 아편 중독자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요. 곳곳에 아편을 피우는 아편굴이 생기고, 중독자들은 아편을 사기 위해 집과 땅, 심지어 아내와 자식까지 팔았어요. 이제는 중국의 은이 영국으로 마구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세금으로 낼 은이 점점 줄어들자, 사람들은 도망치거나 도적 떼에 가담했어요. 관리들은 부정부패를 일삼고, 군대의 기강은 무너졌지요. 중국인의 몸과 정신이 모두 망가져 버렸어요. 반면 영국에 아편 무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았습니다.

아편을 피우는 중국인 모습. 19세기 중반 아편 중독자가 크게 늘면서 중국 사회는 몹시 혼란해졌어요
아편을 피우는 중국인 모습. 19세기 중반 아편 중독자가 크게 늘면서 중국 사회는 몹시 혼란해졌어요. / Corbis/토픽이미지
청나라 황제는 임칙서(林則徐)라는 신하를 광저우에 파견하여 아편 문제를 뿌리 뽑게 했어요. 임칙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요. 외국 상인의 아편을 몰수하고, 다시는 팔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했어요. 그렇게 빼앗은 2만 상자가 넘는 아편 가루를 구덩이에 넣고 석회와 섞어 바다로 흘려보내는 데만 20일 넘게 걸렸습니다. 강하게 저항하는 영국 상인에게는 물과 식량 보급을 끊고, 모든 무역을 금지하였어요. 그러자 화가 난 영국인은 본국에 청나라와의 전쟁을 요구합니다.

결국 1840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아편전쟁이 일어나요. 영국은 아편을 더 판매하겠다는 비도덕적인 목적을 숨기고, '정상적인 무역을 위한 전쟁'이라는 구실을 붙였어요. 2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중국의 동남 해안가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나무로 만든 낡은 배에 보잘것없는 화포를 장착한 중국과 달리 영국 함대는 당시 최신식 3단 화포를 발사하는 증기선을 보유했거든요.

전쟁은 영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고, 1842년 8월 '난징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이 맺어졌어요. 중국은 상하이·샤먼·푸저우·닝보·광저우 등의 항구를 더 개방해야 했고, 배상금을 포함하여 2100만달러라는 큰돈을 지불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홍콩을 영국에 빼앗겼답니다. 홍콩은 아시아로 연결되는 길목에 있는 요충지였거든요.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중국의 자존심은 사정없이 짓밟혔어요. 게다가 정작 중요한 아편 무역에 대한 규정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조약이었지요. 이렇게 홍콩이 영국에 넘어간 뒤, 제2차 아편전쟁을 거치면서 홍콩의 경계 확정을 위한 조약이 체결되었어요. 1898년 신제와 235개의 섬을 99년간 영국에 빌려준다는 약속이 맺어졌습니다.

지난 15일 홍콩 시위대가 경찰이 쏜 후추 스프레이를 우산으로 막는 모습이에요
지난 15일 홍콩 시위대가 경찰이 쏜 후추 스프레이를 우산으로 막는 모습이에요. /AP 뉴시스
이후 중국이 열강의 간섭을 받으며 고단한 역사를 이겨내는 동안, 홍콩은 영국의 지배 아래 자본주의 경제를 성장시켰어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다시 영국 땅이 된 뒤로는 아시아 금융·무역의 허브로 자리 잡았지요. 그리고 약속한 99년이 끝난 1997년 7월 1일, 영국 식민지가 된 지 155년 만에 홍콩은 다시 중국 영토가 되었습니다. 이때 홍콩에 50년간 외교·국방을 제외한 분야의 자치(自治)를 허용한다는 협정이 맺어졌고요. 이렇게 1국가 2체제의 '홍콩특별행정구'가 탄생했답니다.

100년 넘게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산 이들이 하루아침에 하나가 되기란 쉽지 않을 거예요. 오늘날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대화와 타협, 약속을 지키려는 태도가 홍콩을 품은 중국에 필요하지 않을까요?

공미라 | 세계사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