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의 기사
중세 기사의 결투에서 생겨난 펜싱
입력 : 2014.09.30 05:30
| 수정 : 2014.09.30 09:37
중세시대 전쟁의 핵심이었던 '기사', 시합·전쟁 때 두꺼운 갑옷 입었어요
총 발달하자 갑옷 벗고 검술 연마…
먼저 피 흘리면 진다는 결투 규칙에 펜싱처럼 찌르는 검술 발전했답니다
중세시대에는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이 전쟁터에서 큰 역할을 하였어요. 기병은 말을 탄 상태로 싸워야 하므로 매우 수준 높은 전투 기술이 필요하고, 말과 마구 등의 장비까지 갖추려면 돈도 많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병의 신분은 상당히 높았지요. 중세시대에 영주를 섬기는 사람 가운데는 이러한 말을 탄 무사 출신이 많았고요. 이들은 '기사'라고 불리며 영주의 땅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에게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생활하였습니다.
기사가 되는 길은 쉽지 않았어요. 기사가 되려는 남자아이들은 일곱 살 즈음에 부모 품을 떠나 후견인이 될 귀족 집안으로 가서 교육을 받았어요. 그곳에서 말타기 등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고 귀족 부인의 시중을 들며 예의범절을 익혔지요. 14세 무렵에는 기사를 섬기는 종자가 되어 기사와 함께 전쟁터에 나가 말을 돌보거나 기사의 방패와 갑옷을 관리하며 전투 기술을 배웠어요. 어른이 되면 영주나 자신이 섬기는 기사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기사 작위 수여식은 기사 후보자가 영주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면, 영주가 칼등으로 후보자의 어깨를 치며 기사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지요. 기사가 되고 나서는 '기사도'라는 엄격한 행동규범을 따라야 했어요. '기사는 항상 용감하고 성실해야 하며, 명예를 지키고 예의 있게 동료를 대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정중한 태도로 여성을 대해야 한다'는 게 기사도의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기사들은 항상 전투에 대비하는 훈련을 했어요. 13세기부터는 일대일로 창 시합을 벌였는데, 80m 정도 사이를 두고 서로 마주 본 두 명의 기사가 말을 타고 상대방 방패에 창을 겨눈 채 달리는 시합이지요. 창으로 상대를 말에서 떨어뜨리면 시합의 승자가 되었어요. 안전을 위해 시합에 참가하는 기사들은 두꺼운 갑옷을 입었고, 창끝을 뭉툭하게 만들었답니다. 어떤 시합에서는 기사들이 창을 쓰고 난 후에 말에서 내려 칼로 싸우는 시합을 계속하기도 했다고 해요. 이때는 정해진 횟수만큼 번갈아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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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정서용
그런데 총과 같은 무기가 발달하면서 전투에서 갑옷이 쓸모없어졌어요. 총알이 판금 갑옷을 뚫을 수 있었거든요. 총알을 막을 정도로 두꺼운 갑옷은 너무 무거워서 사람이 입을 수가 없었고요. 결국 기사들은 갑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갑옷을 벗어 움직임이 자유로워진 기사들은 검술을 발전시켰어요. 그전에는 갑옷이 상대의 공격을 막아주었기 때문에 공격하는 데만 칼을 사용했지만, 이제는 칼로 적의 공격을 막으며 반격하는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변화에 따라 칼도 다루기 쉽게 얇고 가벼워졌습니다. 검술은 기사가 반드시 갖춰야 할 능력 중 하나가 되었고요.
또한 기사들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자 일대일로 결투를 벌이곤 했어요. 결투 중에 죽거나 다치는 기사도 많았지요. 그래서 '먼저 피를 흘린 쪽이 진다'는 등의 결투 규칙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자 기사들은 상대방이 가장 간단하게 피를 흘리게 하는 방법, 즉 찌르는 검술을 연마하였어요. 바로 여기에서 펜싱이 유래하였답니다.
기사는 중세시대가 끝나면서 서서히 사라졌어요. 이제는 역사책이나 문학작품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요. 하지만 기사도 정신은 아주 사라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몇몇 나라에서는 위대한 업적을 쌓은 사람에게 존경의 표시로 '기사' 작위를 주고 있답니다. 또한 기사도 정신은 오늘날 스포츠의 페어플레이 정신과도 연결되고요. 여러분도 생활 속에서 명예와 예의 바름, 겸손과 성실이라는 기사도 정신을 지켜보세요. 그러면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멋진 기사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