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리는 '수요집회'… 어느덧 23년째
입력 : 2014.09.05 05:38
| 수정 : 2014.09.05 09:03
[일본군위안부 문제]
강제로 일본군위안부 된 여성들… 폭행·감금당해 군인 몇십명씩 상대
일본, 위안부 존재 부정하며 사과 않자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 집회 열려
'평화의 소녀상'은 1000번째 집회 기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거리로 나서는 할머니들이 있습니다. 1992년 1월 8일 시작된 이 집회는 어느새 1142회를 넘기며 세계에서 가장 장기적으로 열린 집회가 되었어요. 할머니들이 향하는 곳은 서울 종로구 중학동에 있는 주한 일본 대사관 앞이에요. 일본군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진실을 밝힐 것과 공식적인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지요.
이곳에는 할머니들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은 '평화의 소녀상'이 있습니다. 거칠게 잘린 단발머리로 의자에 앉아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어요. 담담한 표정으로 일본 대사관을 바라보는 '평화의 소녀상'은 할머니들의 1000번째 집회를 기념하여 국민 성금으로 만든 것입니다. 지난 7월 말에는 피해 할머니 두 명이 미국에서 백악관·국무부 관료를 만나 일본군위안부의 실태를 알리기도 했어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더 높아지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이곳에는 할머니들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은 '평화의 소녀상'이 있습니다. 거칠게 잘린 단발머리로 의자에 앉아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어요. 담담한 표정으로 일본 대사관을 바라보는 '평화의 소녀상'은 할머니들의 1000번째 집회를 기념하여 국민 성금으로 만든 것입니다. 지난 7월 말에는 피해 할머니 두 명이 미국에서 백악관·국무부 관료를 만나 일본군위안부의 실태를 알리기도 했어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더 높아지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 ▲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수요일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려요. 집회에 참여한 한 학생이 일본 대사관 앞에 설치된‘평화의 소녀상’에 우산을 씌워 주고 있어요. /이찬 인턴기자(광주대 사진영상학과 4년)
일본군위안부란 우리나라·중국 등 한자어 문화권에서 사용하는 말이에요. 유엔 등 국제기구를 포함한 영어권 국가에서는 '일본에 의한 성 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라는 용어를 씁니다. '정신대' 혹은 '종군 위안부'라는 표현은 일본이 만들어낸 말이지요. 정신대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를, 종군 위안부는 본인이 원해서 위안부가 된 사람을 뜻해요. 당시 여성들이 마치 자원하여 위안부가 된 것처럼 꾸며 일본의 만행을 숨기려는 의도를 가진 말이지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타이완·필리핀·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각국 여성들이 위안부로 끌려갔고, 식민지였던 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습니다.
주로 10대 초반에서 40대까지 여성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어요. 학교에 다니고 싶었던 소녀는 학교에 보내준다는 거짓말에 속았습니다. 트럭을 처음 보고 신기해하던 소녀는 트럭을 태워준다는 말에 올라탔다가 결국 내리지 못했지요. 가난한 소녀는 공장·식당에 취직하거나 간호사가 되어 돈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사기를 당했어요.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당한 여성들도 있습니다. 울며 매달리는 어린아이를 둔 여성까지 강제로 아이를 떼어놓으며 끌고 갔지요. 도망치려는 여성을 나무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어요. 수많은 여성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위안부가 되어야 했습니다.
위안부가 된 후의 생활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어요. 일본군의 전쟁터를 따라 아시아와 태평양의 섬 곳곳으로 이동하며 위안소라는 곳에서 생활해야 했지요. 외출도 할 수 없고 한국말도 사용할 수 없었어요. 하루 10~30명의 군인을 상대하며 비참하게 생활했다고 해요. 병에 걸려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고 저항하다가 매를 맞아 죽는 경우도 허다했어요. 가족이 보고 싶어도 연락할 길이 없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습니다.
- ▲ (왼쪽)지난달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명동성당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 위로하는 모습이에요. (오른쪽)위안부 피해자인 고(故) 김순덕 할머니가 그린‘못다 핀 꽃’. /뉴시스·이태훈 기자
1990년대까지 일본 정부는 위안소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있었다고 하더라도 여성들이 자원하여 위안부가 된 것이라고 주장했어요.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을 시작으로 200여명이 넘는 할머니들의 증언이 이어지며 일본의 만행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방위성 도서관에서는 위안소가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고요. 미국에서도 일본군이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증거 자료가 나타났어요. 국제사회에서도 인권이 짓밟힌 할머니들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위안부는 불법이며, 할머니들이 이미 나이가 많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빨리 사과하라'고 촉구했지요. 하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일본군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며 사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1995년 7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을 설립하여 피해 여성에게 보상하겠다고 했을 뿐이에요.
23년째 수요집회를 이어가는 할머니들은 이러한 보상금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세상에는 그런 일이 없어야지. 나 같은 사람이 다시는 없어야지. 내 잘못도 아닌데 일생을 다 잃어버리고…"라고 말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에는 국민을 지키지 못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와 슬픔이 담겨 있어요. 할머니들이 고령임에도 집회에 나서는 까닭은 이 세상에서 여성의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하루빨리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와 적합한 배상, 책임자의 엄중한 처벌이 이루어져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