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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계급·종교 대립 넘어… 독립 이뤄낸 '위대한 영혼(마하트마)'

입력 : 2014.08.21 05:29 | 수정 : 2014.08.21 09:12

[28] 마하트마 간디

간디(1869~1948)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란차드 간디지만, 보통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립니다.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에요. 인도 시인 타고르가 붙인 존칭이지요. 간디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로, 영국의 식민 지배에 대항하여 비폭력 저항 운동을 벌였고, 종교 때문에 갈라섰던 인도 국민을 하나로 이끈 민족 지도자였습니다.

어린 시절 간디는 소심하고 겁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수줍음이 많아서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무척 힘들어했어요. 청년 시절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변호사가 되었을 때도 재판정에서 변호는커녕 부끄러워서 말 한마디 못한 적이 있다고 해요. 그러던 어느 날 변호사 일로 남아프리카에 간 간디는 그곳에서 차별받는 인도인을 보았습니다. 당시 백인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유색인종인 인도인은 극심한 차별에 시달렸거든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지요. 게다가 남아프리카 정부는 인도인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목적으로 '아시아인등록법'이라는 것까지 만들었습니다. 간디는 다른 인도인과 함께 이 부당한 법에 반발하였지요.

인도 델리에 있는 ‘소금 행진’ 기념 동상이에요. 영국 식민 정부가 소금에 과도한 세금을 물리자, 간디는 이에 대항해 1930년 ‘소금 행진’을 벌였어요. 이 행진은 대표적인 비폭력 저항운동이었지요
인도 델리에 있는 ‘소금 행진’ 기념 동상이에요. 영국 식민 정부가 소금에 과도한 세금을 물리자, 간디는 이에 대항해 1930년 ‘소금 행진’을 벌였어요. 이 행진은 대표적인 비폭력 저항운동이었지요. /Corbis/토픽이미지
이때 간디가 택한 방법은 폭력적 시위가 아닌 '사티아그라하 운동', 즉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어요. '사티아그라하'는 산스크리트어로 '진리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남아프리카 정부는 간디와 인도인 노동자의 평화 행진을 잔인한 폭력으로 탄압하였어요. 하지만 이 일로 남아프리카 정부는 전 세계의 지탄을 받았고, 간디의 평화 행진은 더 많은 인도인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지요. 이 저항 운동으로 마침내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을 괴롭히던 악법이 사라졌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간디는 영국의 식민 지배 아래 신음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기로 다짐하고, 인도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모든 인도인이 노동을 거부하는 하르탈 운동, 국산품 장려 운동인 스와데시 운동 등을 벌이며 영국에 저항하지요. 인도인은 간디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고, '비폭력'이라는 원칙에 따라 독립운동을 벌입니다.

인도 500루피 화폐에 담긴 간디 초상화와 ‘소금 행진’ 모습
인도 500루피 화폐에 담긴 간디 초상화와 ‘소금 행진’ 모습. /인도중앙은행

인도인은 먼 옛날부터 결혼이나 직업 선택은 물론 식사 같은 일생생활에 이르기까지 '카스트'라는 엄격한 신분 제도의 규제를 받았어요. 이 신분 제도 때문에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인도인이 하나로 뭉치지 못했지요. 더구나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 등 종교 갈등도 심각했고요. 하지만 간디의 노력 덕분에 인도인은 계급과 종교를 넘어 화합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감옥에 갇혔지만, 인도인의 비폭력 저항 운동은 사그라지지 않았어요. 1947년 마침내 영국 정부는 인도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독립을 이룬 예는 이전까지 없었어요.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과 인도의 독립은 인류가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평화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전 인류에게 일깨워주었지요. 이것이 오늘날 마하트마 간디가 '평화의 상징'으로 기억되며, 위대한 영혼으로 추앙받는 이유입니다.

[1분 상식] '타고르'는 어떤 사람인가요?

타고르(Tagore·1861~1941)는 인도의 시인이자 사상가예요. 인도 벵골 지역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11세 무렵부터 시를 쓰고, 16세에 첫 시집 ‘들꽃’을 펴냈다고 해요. 1877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법학과 유럽 사상을 공부했어요. 귀국 후에는 벵골어로 인도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작품을 썼지요. 이후 아내와 딸의 죽음을 겪으면서 종교적인 작품을 쓰게 되었으며, 1910년 서정시집 ‘기탄잘리’를 발표하여 1913년 동양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요. 인도 콜카타 근교에 학당을 세워 교육에 힘쓰며 독립운동 지도자로도 활동했습니다.


김선영 | 후(who) 시리즈 위인전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