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세상

민생 안정을 위해… '수레' 보급하려 한 개혁파 선비

입력 : 2014.08.20 05:49 | 수정 : 2014.08.20 09:07

[28] 박제가 '북학의'

청의 문물에서 사회개혁안 찾은 박제가… 수레 보급·도로 정비 강조한 '북학의'
박지원·홍대용처럼 청나라 문물 배워 도구·상공업 발전시키려던 '북학파'
박제가, 우리말 대신 중국어 사용 주장… 오늘날 영어 공용어화 제안과 비슷해요

최근 장·차관 등 우리나라 주요 정부기관의 수뇌부가 교체되며 이른바 제2기 내각이 출범하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들과 함께한 첫 국무회의에서 경제 살리기에 온 힘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하지요. 예나 지금이나 '민생(民生·일반 국민의 생활 및 생계)' 문제는 나라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인가 봅니다. 먼 옛날 중국의 맹자도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백성이 바른 마음을 가지기 어렵다'는 뜻의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을 주장하였으니까요. 조선시대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을 겪고, 당쟁(黨爭) 등으로 백성의 삶이 곤궁해지자 수많은 민란이 발생했던 것도 민생 안정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사례입니다.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는 이처럼 피폐했던 조선의 현실과 백성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대책이 상세히 담겨 있어요.

조선 후기 실학자 중에서도 도구의 활용과 상공업 발전을 주장하던 이들을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라 부릅니다. 이용후생이란 '도구를 편리하게 하고 재물을 풍요롭게 한다'는 뜻이지요. 박지원, 홍대용,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으로 구성된 이용후생 학파는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면 당시 오랑캐라며 배척하던 청나라의 문화도 기꺼이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래서 '북학파(北學派)'라고도 부릅니다.

[책으로 보는 세상] 민생 안정을 위해…  '수레' 보급하려 한 개혁파 선비
/그림=이병익
박제가는 1778년 종사관이라는 직책으로 청나라에 가게 돼요. 그때 청의 풍속과 일상용품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했다가 조선에서 시행할 만한 것을 골라 그 이로움을 밝힌 책이 바로 '북학의'입니다. 그러면 박제가가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한 '수레'에 대한 기록을 살펴볼까요?

"산골에는 붉은팥이 흔하고, 해변에는 창명젓과 메기가 흔하다. 또 영남 지방의 고찰에서는 좋은 종이를 생산하고, 청산·보은에는 대추나무가 많으며, 한강 입구에 있는 강화에는 감이 많다. 백성은 이런 물자를 서로 이용하여 풍족하게 쓰고 싶어도 힘이 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말이 있지 않으냐?' 한다. 그러나 말 한 필과 수레 한 대가 운반하는 양이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수레가 훨씬 유리하다."

박제가는 당시 지역마다 생산되는 풍부한 물자들이 서로 유통되지 못하여 백성이 골고루 쓸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겼어요. 그래서 청나라처럼 많은 물자를 편리하게 실어나를 수 있는 수레를 보급하고, 수레가 다닐 수 있게 도로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북학의'는 수레 외에도 배, 성, 도로, 교량과 같이 생산활동을 촉진하는 사회기반시설 건설부터 과거제도, 무역, 군사, 외교 문제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사회개혁안을 담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거름, 여자 옷, 문방구, 된장, 도장과 같이 작은 일도 백성의 삶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세심하게 기록했지요. 이 책을 읽다 보면 백성을 향한 박제가의 마음이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이야기

'잉글리쉬 디바이드(English divide)'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 실력이 출세와 소득까지 결정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에요. 경제적 차이가 영어 실력의 차이를 낳고, 이것이 다시 사회·경제적 격차로 이어진다는 뜻이지요. 진학이나 취업에서 영어 실력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다 보니 생겨난 현상일 거예요. 우리나라의 영어 사교육비가 매년 수조원에 이르는 것도 이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나라도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라 전체의 경쟁력을 키우고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도 누구나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영어를 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영어를 잘할 목적으로 우리말까지 버려야 할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와 비슷한 주장이 '북학의'에도 실려 있어요. 박제가는 중국의 선진 문물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사용하자고 주장했거든요.

"중국은 말로 인해서 글자가 나왔고 글자를 찾아서 말을 풀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다른 나라가 중국처럼 문학을 숭상하고 글 읽기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이는 언어라는 커다란 꺼풀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지역적으로 중국과 가깝고 성음도 비슷하다. 따라서 백성 전체가 본국의 말을 버린다 해서 안 될 이유가 없다. 그래야만 오랑캐라는 말을 면할 것이며, 동쪽 수천리 땅에 스스로 주(周)·한(漢)·당(唐)·송(宋)의 풍속을 열게 될 것이다."

말과 글이 서로 달라 백성이 어려움을 겪는 현실에서 세종대왕이 한자를 한글로 바꾸는 해결책을 내놓았다면, 박제가는 우리말을 중국어로 바꾸는 해결책을 내놓은 것이에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렇게 주장한 이유를 짐작할 수는 있지만, '이용후생'을 위해 나라말까지 버려야 한다는 박제가의 주장에 대해서는 오늘날 비판적인 의견이 대부분입니다.

박제가는 누구보다 재주 많은 선비였지만, 서얼 차별이라는 불합리한 제도와 관습 때문에 설움을 당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함께 공부한 '북학파' 선비들이 있어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지요. 그 덕분에 훗날 정조 임금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었고요. 비록 '중국어 사용'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도 담겼지만, '북학의'에는 백성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한 선비의 노력이 구구절절 묻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북학의'는 어떤 내용일지 고민해 보세요.


[함께 생각해봐요]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학문 사상이 나타났어요. 이 시기 실학이 등장한 이유와 실학의 특징을 찾아보세요. 정약용 등 대표적인 실학자의 주장도 함께 살펴보세요.


최혜정 | 한우리독서토론논술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