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갔어요

아무리 봐도 지겹지 않은, 기품 있는 달항아리

입력 : 2014.08.15 05:44 | 수정 : 2014.08.15 10:46

[91] 백자예찬 '미술, 백자를 품다' 展

보름달처럼 한결같이 고요한 기품
상처도 받아들여 더욱 단단해진 모습… 우리 민족의 순박함 닮았어요
이음새 흔적·얼룩 남은 달항아리… 완벽하지 않은 어수룩함이 더 정겨워

"참 잘생겼다~." 어른들이 둥그렇고 묵직한 수박 한 덩어리를 만지며 종종 이런 말씀을 하지요? 넉넉하게 둥근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작품 1)를 보아도 '잘생겼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둥근 것은 모자람 없이 완전하게 채워진 모양이라 보는 이에게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게 하니까요. 자꾸 보아도 또 보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 얼굴을 '환한 달덩이 같은 얼굴'이라고 표현하는데, 백자 달항아리도 이 표현에 꼭 들어맞습니다. 둥근 보름달처럼 어디를 보아도 예쁘고, 아무리 보아도 지겹지가 않거든요.

작품 1. 백자 달항아리 사진
작품 1. 백자 달항아리, 17~18세기.
백자 달항아리의 흰 빛깔도 그렇습니다. 휘황찬란한 여러 색 사이에서 흰색은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는 않지만, 언제 보아도 한결같은 고요한 기품을 풍기지요. 무늬 하나 없이 온통 하얗기만 한 달항아리는 자기 좀 봐달라고 소란을 떠는 일이 좀체 없습니다. 저마다 어여쁜 빛깔과 무늬로 인정받고 싶어 안달인 물건들 사이에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기다릴 뿐이에요.

둥글고 하얀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옆선이 모나지 않아 안심하고 선뜻 다가갈 수 있고, 여유롭고 풍성한 그 생김새는 익숙하고 정겨운 느낌을 주지요. 아이를 가진 여인의 볼록한 배처럼 흐뭇한 소식을 담고 있을 것 같기도 해요. 하얀 항아리는 표면에 작은 흠이 나 있고 여기저기에 얼룩도 퍼진 상태입니다. 불가마 속에서 뜻하지 않게 불순물이 들어가 흠이 생겼고, 표면에 유약을 고르게 펴 바르지 못하는 바람에 얼룩진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 항아리는 자기 몸에 생긴 흠과 얼룩에도 개의치 않는 것 같습니다.

백자의 매력에 폭 빠진 시인 김상옥은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라며 백자 항아리를 예찬했어요. 백자는 뜨거운 시련을 겪고도 망가지기는커녕 더욱 단단해져 하얀빛이 나는 사람,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받지만 그것조차 덤덤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순박한 성품을 지닌 우리 민족을 닮은 듯합니다.

작품 2. 도상봉, ‘정물’의 일부 사진
작품 2. 도상봉, ‘정물’의 일부, 1954.
작품 2는 화가 도상봉의 정물화 속에 나온 달항아리입니다. 그림 속 항아리는 커다랗고 둥글지만, 가운데 배 부분은 약간 이지러졌네요. 사실 달항아리는 커다란 사발 모양 두 개를 위아래로 붙여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중간 부분에 이음매 흔적이 살짝 남기도 해요. 달항아리가 소박하고 수수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어수룩함 때문일 거예요. 자로 재고 계산해서 만든 완벽한 동그라미가 아니라 덤덤한 마음으로 둥그스름하고 부드러운 모양을 상상하며 만든 것이니까요.

일본의 학자이자 공예품 수집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 백자는 곡선이 아름다워서 그런지 손으로 어루만지고 싶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어요. 높은 곳에 올려놓고 감상해야 하는 긴장감을 주는 항아리가 아니라, 손길 닿는 곳에 두고 싶은 정겹고 사랑스러운 항아리라는 뜻이겠지요.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제강점기의 일본 지식인이었지만, 조선 문화를 무조건 낮게 평가하고자 했던 일제의 식민정책을 따르던 사람이 아니었어요. 조선의 미술 문화에 반한 그는 자신의 감동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지요.

작품 3. 김환기, ‘항아리와 매화 가지’ 사진
작품 3. 김환기, ‘항아리와 매화 가지’, 1958.
작품 3은 화가 김환기가 그린 달항아리예요. 그가 1950년대에 그린 그림에는 둥근 백자 모양이 자주 나타납니다. 작품 3에서는 파란 하늘 위에 흰 항아리가 마치 달처럼 걸린 것을 볼 수 있어요. 파랑과 하양이 산뜻한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매화 한 가지가 그 위를 운치 있게 가로지르지요.

작품 4. 강익중, ‘달항아리 E30A-2006’ 사진
작품 4. 강익중, ‘달항아리 E30A-2006’, 2006.
강익중이 그린 달항아리(작품 4)도 까만 밤하늘에 둥실 떠오른 노란 달 같습니다. 보름달이 되기 하루 전의 달처럼, 약간 어수룩하게 둥글어서 조금 모자란 듯하지만, 그래서 더욱 정감이 가지요. 달항아리에 깃든 온화한 달님 얼굴은 예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네요.


서울미술관 (02)395-0100
이주은 |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