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일본 제국주의의 발판이 된 전쟁은?
입력 : 2014.07.25 05:48
| 수정 : 2014.07.25 09:01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
일본에 진 청, 시모노세키 조약 맺어 조선에 대한 권리 포기·배상금 지불
센카쿠·타이완 등 일본 땅 되었어요
아베 정부, 전쟁 금지한 헌법 해석 바꿔 전 세계가 관심 갖고 지켜봐요
이달 초 일본의 아베 정부는 '가까운 관계에 있는 국가가 공격받으면 일본도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결정을 내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어요. '일본이 직접 공격받았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쟁을 금지한다'는 일본 평화헌법의 해석을 변경해서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된다는 의미이지요. 특히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놓고 중국과, 독도를 둘러싸고 우리나라와 갈등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더 큰 관심을 모으고 있어요. 이에 발맞춰 중국은 과거 청일(淸日)전쟁의 치욕을 잊지 않고 마음 깊이 새기겠다며, 일본에 침몰당한 배를 복원해 역사 교육 현장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어요. 청일전쟁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일본,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 ▲ 1895년 일본과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어요. 이 즈음부터 일본의 제국주의는 점점 기세를 떨치기 시작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계속됐지요. /AFP
일본은 청과 1871년 서로 싸우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었지만,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었지요. 아편전쟁에서 진 이후에 청은 리훙장이 주도하는 개혁 운동을 벌이고 있었어요.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화 운동을 하고 있었지요. 두 나라의 개혁 방향은 독일의 정치가 비스마르크의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어요. 그는 "청은 독일에서 최신식 전함을 사 가는 것이 목표였으며, 일본은 독일의 제도와 시스템을 배워 가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지요. 당시 청은 서양 무기만 있으면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최신 무기만 있다고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어요. 청의 관리들은 자기 주머니를 챙기기에 급급했고, 서태후의 별장인 이화원 건축과 생일 파티 준비에 군사 비용을 퍼다 쓰는 형편이었죠. 청의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는 일본은 서양식으로 제도까지 개혁한 후 전쟁 기회를 노리고 있었어요.
- ▲ 1894년 일본은 우리나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인천항으로 군대를 보냈어요.
자, 이제 풍도해전에서 일본은 거의 피해가 없었는데 청은 크게 패한 이유를 살펴봅시다. 당시 청의 군대가 쓰던 포탄은 무늬만 포탄이지 사실은 진흙으로 구워 만든 흙덩이였어요. 포탄 대부분이 흙덩이에 검은 칠을 한 것이었지요. 착실히 전쟁을 준비해 온 일본 앞에서 청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지요. 청은 성환 전투와 평양 전투 등 이어진 싸움에서도 크게 패했어요. 청나라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주력 함대의 대표적인 배는 1894년 황해해전에서 일본군에 침몰당했죠. 일본의 기세가 점점 커졌고, 중국은 본토까지 침략당할 위기에 놓이자 결국 패배를 인정했어요.
- ▲ 일본이 청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조약을 맺은 것을 기념하는 전시관이에요. /일본 방위성
청일전쟁 후 120년, 중국도 일본도 우리나라도 과거 모습과는 달라졌어요. 하지만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실패가 되풀이될 수도 있어요. 이번 방학에 유익한 역사 체험을 하고 싶으면 용산 전쟁기념관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곳에서 청일전쟁과 당시 우리나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거든요. 과거를 통해 동아시아 각국의 미래를 찾아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갖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