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세상
현대 산업에도 빈번한 허생의 '독점 횡포'
[12] 허생전
변씨에게 돈 빌려 생필품 독점하여 가격 폭등하면 비싼 가격으로 판 허생
이러한 불공정 경쟁은 현대 산업에서 시장질서 어지럽힌 독점시장과 닮았죠
정부의 적극적인 감시와 대책 시급해요
최근 어린이·청소년까지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통신 요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가정이 크게 늘었어요. 정부도 통신 요금 문제를 두고 통신 회사들과 갑론을박(甲論乙駁)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통신 시장은 소수 기업이 특정 산업을 점유한 과점(寡占) 시장이에요. 과점 시장에서는 많은 기업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시장보다 가격이 높게 형성되기 쉬워요. 소수 기업이 가격 경쟁을 피하고 이익을 최대화하려고 몰래 가격과 공급량 등을 협의하여 조절하기도 하지요. 이를 '담합(談合)'이라고 합니다. 담합은 시장 질서를 해치기 때문에 정부에서 엄격하게 금지해요. 그런데 불공정한 경쟁으로 시장 질서를 어지럽혀 큰돈을 번 사람 이야기가 연암 박지원의 소설에 등장한답니다. 바로 '허생전(許生傳)'의 주인공 허생이에요.
허생은 본래 남산 밑에 자리한 두어 칸짜리 초가에서 책만 읽으며 사는 가난한 선비였습니다. 그런데 오랜 가난에 지친 아내의 호소에 못 이겨 집을 나서지요. 그는 한양에서 제일 큰 부자인 역관 변승업을 찾아가 호기롭게 1만냥을 꾼 뒤, 안성으로 내려가 과일을 사들입니다. 이상하게도 사들인 과일을 바로 되팔지 않고 창고에 쌓아두지요.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나라의 과일 값이 폭등하기 시작했어요. 허생은 이때 과일을 되팔아 이윤을 10배 남겨요. 이런 방식으로 5년 만에 1만냥을 100만냥으로 불리고, 변씨에게 은 십만 냥을 갚지요. 허생이 변씨에게 털어놓은 장사 비결을 들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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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이병익
"우리 조선은 배를 타고 외국과 통행하는 일도 없고 수레를 타고 나라 안을 다닐 수도 없어 모든 물자가 나라 안에서 나와 나라 안에서 소비되오. (중략) 만 냥으로 한 가지 물건을 다 살 수 있으므로, 고을에 있는 것이면 고을 전체를 살 수 있지요. 이는 그물코를 벌려 놓은 것 같아서 그 그물에 걸려든 물건을 몽땅 살 수 있소. 육지에서 나는 물건도 만 냥이면 한 가지는 다 사들일 것이고, 물에서 나는 물건도 만 냥만 가지면 그중 한 가지는 독점할 수 있고, 의약품 중에서도 만 냥이면 한 가지는 교역을 정지시킬 수가 있을 것이오."
허생처럼 물건 값이 오르기를 바라며 대량으로 사들여 가격이 폭등할 때까지 팔지 않고 기다리는 행위를 '매점매석(買占賣惜)'이라고 합니다. 허생이 큰돈을 번 비결은 결국 '독점(獨占)의 횡포'였던 거예요. 특정 기업이 혼자서 산업을 장악한 다음 폭리를 얻고자 가격이나 공급량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독점'은 '담합'과 마찬가지로 시장 질서를 크게 해칩니다. 박지원도 이 소설 속에서 허생의 입을 통해 "훗날 이런 방법을 쓰는 자가 생기면 나라를 병들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지요.
#이야기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자기를 추대한 서인들 주장에 따라 망해가던 명나라를 가까이하며, 훗날 청나라가 되는 후금과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1627년(인조 5년)에 정묘호란,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지요.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고,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훗날의 효종)마저 볼모로 보내는 굴욕을 겪습니다.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청나라를 정벌하고자 새로운 부대를 설치하고 군사 수를 늘리며 '북벌 정책'을 실시하지요. '허생전'에는 북벌 정책의 선봉에 섰던 실재 인물이 등장해요. 바로 '이완'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중앙에 설치된 오군영 중에서도 왕을 호위하던 어영청의 대장이었어요. 허생은 나랏일을 의논하고 훌륭한 인재를 구하러 왔다는 이완에게 세 가지 계책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완은 "어느 계책도 실행하기 어렵다"고 대답해요. 허생이 알려준 계책은 왕족이 멸망한 명나라 후예들과 결혼하여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게 하거나 사대부의 자제를 청에 보내 학문을 배우고 벼슬을 하게 하여 장차 청을 제압할 준비를 하자는 내용이었거든요. 그것을 체면과 명분만 중시하는 왕족이나 사대부가 받아들일 리 없다는 거예요.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 구호뿐인 북벌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과 실리 없는 명분만을 추구하는 당대 지도층의 위선을 꼬집었지요.
박지원은 청나라를 여행하며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중국의 제일 장관은 저 기와 조각에 있고, 저 똥 덩어리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청나라의 기와 조각과 똥 덩어리 같은 사소한 것이라도 우리 백성의 살림을 풍족하게 하고, 더 나은 문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뜻이지요. '허생전'은 '열하일기' 제10권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린 소설로, 백성의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던 연암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박지원은 북학(北學)을 통해 청의 선진 문물을 흡수하여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래서 북학파(派)를 '이용후생(利用厚生)학파'라고도 부르지요. '이용후생'이란 기구를 편리하게 쓰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넉넉하게 하여 백성의 생활을 나아지게 한다는 뜻이에요.
만약 박지원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본다면 이용후생을 이루었다며 만족할까요? 아마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의 주장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지요. "이용(利用)이 있은 뒤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正德)을 이룰 수 있다." 그는 단지 부강한 나라를 원한 것이 아니라 안정된 생활을 바탕으로 '덕(德)'이 바로 선 나라를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용후생'이라는 말로만 기억하는 박지원의 진짜 주장은 사실 '정덕'에 담겨 있지 않을까요?
[함께 생각해봐요]
요즘에도 허생처럼 사과나 배 같은 과일 한 가지 품목을 매점매석하여 큰돈을 버는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이 어려워진 이유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