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백의(白衣·흰옷) 천사'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크림전쟁

입력 : 2014.03.21 05:35 | 수정 : 2014.03.21 08:52

[크림전쟁]

1853년 그리스 정교도 보호 구실로 오스만제국과 크림전쟁 벌인 러시아… 영국·프랑스 개입으로 결국 패배했죠
전쟁에서 전염병으로 병사들 죽어갈 때 아군·적군 구분없이 간호한 나이팅게일… 생명 구하고 숭고한 희생정신 보여줬죠

세계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흑해 북쪽에 '크림(Krym) 반도'라는 달콤한 이름을 가진 지역이 있어요. 영어로는 '크리미아(Crimea) 반도'라고 부르지요. 북쪽으로는 우크라이나에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케르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마주 보고 있어요. 크림반도는 구소련 시절에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었으나, 1991년 자치권을 얻어 우크라이나의 자치공화국이 되었지요. 주민 대부분은 러시아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뉴스에서 많이 보았겠지만, 요즘 국제사회에서는 크림반도의 러시아 귀속 문제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어요. 지난 16일, 이 문제를 놓고 주민투표가 이루어졌는데 '투표 주민의 약 97%가 러시아 귀속에 동의한다'는 결과가 나와 전 세계가 크림반도를 주목하고 있지요. 귀속을 찬성하는 크림반도 주민과 러시아, 그리고 이를 반대하는 서구 열강 사이의 갈등도 커지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크림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국제사회의 갈등은 이번에 처음 벌어진 게 아니에요. 역사적으로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었지요. 오늘은 19세기에 일어난 '크림전쟁'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크림반도는 주민 대부분이 러시아인으로 구성됐어요. 최근 크림반도의 러시아 귀속 문제로 국제사회에 분쟁이 일었지요.
크림반도는 주민 대부분이 러시아인으로 구성됐어요. 최근 크림반도의 러시아 귀속 문제로 국제사회에 분쟁이 일었지요. /Corbis 토픽이미지
16세기 이래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에 걸쳐 대제국을 수립한 오스만제국(지금의 터키)은 19세기에 들어서며 그 세력이 점차 약해졌어요. 외부에서는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강대국이 호시탐탐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내비치고 있었지요. 특히 러시아는 얼지 않는 항구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답니다. 내부에서는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많은 민족이 독립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고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오스만제국은 서양식 군대를 만들고 탄지마트라는 개혁을 시도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어요.

마침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가톨릭교도들의 인기를 얻고자 오스만제국에 예루살렘 성지(聖地)에서 가톨릭교도에게 특권을 줄 것을 요구하면서 문제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갈 기회만 엿보던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이것이 오스만제국 내에 거주하는 그리스 정교도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는 이 땅의 그리스 정교도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오스만제국에 선전포고를 했지요. 그러자 영국·프랑스·프로이센·사르데냐가 오스만제국의 편을 들어 러시아와 맞서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흑해와 크림반도를 둘러싸고 1853년부터 1856년까지 3년간 벌어진 이 전쟁을 '크림전쟁'이라고 불러요. 전쟁 당시 러시아는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항(港)에서 끝까지 버텼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지요. 동유럽 일대를 크게 뒤흔든 크림전쟁은 이후 러시아에 근대화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켰어요. 오스만제국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이후 제국 영토가 점점 작아져 '유럽의 병자(病者)'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고요.

크림전쟁은 무엇보다도 간호위생학 발전에 큰 계기가 되었답니다. 당시 전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콜레라까지 유행하여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갔어요. 다친 병사들은 크림반도에서 흑해를 건너는 배에 실려 이스탄불로 옮겨졌지만, 의사도 간호사도 충분하지 않았지요. 게다가 당시에는 간호사를 매우 천한 직업으로 여겼기에 누구도 선뜻 간호사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왼쪽 위 사진)1853년 크림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주변국 상황이에요. (왼쪽 아래 사진)크림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국제사회의 갈등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어요. 1853년 일어난‘크림전쟁’도 그중 하나이지요. (오른쪽 사진)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에서 활약하며 간호학 발전을 이끌었어요.
(왼쪽 위 사진)1853년 크림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주변국 상황이에요. (왼쪽 아래 사진)크림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국제사회의 갈등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어요. 1853년 일어난‘크림전쟁’도 그중 하나이지요. (오른쪽 사진)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에서 활약하며 간호학 발전을 이끌었어요. /위키피디아
이때 용기 있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에요.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전문적인 간호 교육을 받은 나이팅게일은 넘치는 교양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녀는 38명의 간호대를 조직하여 이스탄불에 있는 위스퀴다르 병원으로 갔지요. 당시 군 병원은 이름만 병원이었지, 응급치료를 마친 환자들이 군복을 그대로 입은 채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했어요. 나이팅게일은 무엇보다도 환자들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깨끗한 환자복을 입히고, 침대 시트를 청결하게 관리하며 합리적인 병원 체계를 갖춰 나갔습니다. 병원 운영에 잘못된 관습이 있다면 과감히 바꾸기도 했어요.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며 환자들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심어주기도 했지요. 밤에는 등불을 들고 병사 한 명 한 명의 상태를 돌보고 다녀 '등불을 든 천사'라는 별명도 얻었어요.

그녀의 활약상이 전해지자 뜻있는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훗날 전쟁이 끝난 후 런던에 간호학교를 세웠다고 해요. 또한 나이팅게일이 꾸준히 써 내려간 '병원에 관한 노트'와 '간호 노트' 등은 각 나라로 전해져 간호법이나 간호사 양성을 위한 기초 교재가 되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을 통해 많은 여성이 간호 전문 인력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고요. 여성의 사회 참여와 함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는 큰 변화까지 가져왔답니다.

지금도 간호사가 되려는 사람들은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나이팅게일 선서를 해요. 국제적십자를 만든 앙리 뒤낭은 "내가 적십자를 만들기 위해 나선 것은 크림전쟁에서 보여준 나이팅게일의 희생과 봉사정신 때문이었다. 적십자를 만든 건 내가 아니라 나이팅게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나이팅게일의 삶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도 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시키는지 잘 보여줍니다.


공미라 | 세계사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