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여행

부녀자들 치마폭에 돌 담아 날라 왜군 무찌른 '행주대첩'

입력 : 2014.03.05 04:32

[72] 행주산성

행주대첩을 지휘한 권율 장군 모습이에요.
행주대첩을 지휘한 권율 장군 모습이에요. /조선일보 DB
조선시대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을 꼽는다면 임진왜란을 들 수 있어요. 임진년인 1592년(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1598년(선조 31년)까지 7년 동안 왜군이 두 번이나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사건을 말해요. 임진왜란 때 조선 군대가 왜군을 크게 무찌른 세 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우리 역사에서는 이를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고 부릅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이끌고 왜군의 배를 전멸시킨 한산도대첩(1592년),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행주대첩(1593년), 진주 목사 김시민과 의병 곽재우가 힘을 합쳐 왜구를 물리친 진주성대첩(1592년)이 바로 임진왜란 3대 대첩이지요.

오늘 찾아갈 곳은 임진왜란 때 왜군과의 싸움에서 승전고()를 울린 행주대첩의 격전지, 행주산성입니다. 행주산성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의 덕양산에 있어요. 행주산성은 삼국시대 때 흙으로 지어진 산성인데, 덕양산에는 아직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권율 장군은 이미 왜군의 손에 넘어간 서울을 빼앗기 위해 관군()과 승군(), 의병 등 약 1만명의 군사를 데리고 행주산성에 진을 쳤답니다. 말뚝을 박아 성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왜군과 맞섰지요. 당시 왜군의 수는 무려 3만명. 군사 수만 봤을 때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어요. 더구나 싸움이 계속될수록 화살과 포탄이 부족해져 성은 오히려 함락 위기에 처했습니다. 권율 장군은 군사들에게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에게 돌을 던지고, 뜨거운 물을 부으라고 지시했어요. 적의 시야를 방해하기 위해서 '재주머니 던지기' 전법을 쓰기도 했답니다. 이때 우리 군사와 함께 싸운 이들이 바로 부녀자()들이었어요.

그들은 치마폭에 돌을 담아 나르고, 물을 끓이며 전투를 도와 승리를 일궈냈지요. 어떤 사람들은 '행주치마'라는 말이 행주대첩 때 부녀자들이 짧은 치마에 돌을 담아 나른 데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그전에도 이미 행주치마라는 단어를 기록한 책이 있거든요. 행주치마를 떠올리면 행주대첩을 쉽게 외울 수 있겠지만, 그냥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행주산성 안에는 행주대첩기념관이 있어요. 이곳에는 행주대첩 당시 쓰인 화차(), 화포 등의 무기와 갑옷 등이 전시되어 500년 전 전쟁에서는 어떤 무기를 사용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행주대첩 승전을 기념하고자 1963년에 건립한 비입니다. 덕양산(경기도 고양시) 정상에 우뚝 서 있지요.
행주대첩 승전을 기념하고자 1963년에 건립한 비입니다. 덕양산(경기도 고양시) 정상에 우뚝 서 있지요. /문화재청
기념관 앞에는 권율 장군 동상이 있고요. 기념관을 지나 더 올라가면 1602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고, 1963년에 다시 세운 큰 행주대첩비와 권율 장군을 모시는 사당 충장사, 정자 덕양정 등이 있어요. 덕양정에 서면 바로 눈앞에 방화대교가 보이고, 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풍경이 펼쳐지지요.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받으며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오솔길 같은 토성 길을 한번 걸어보고, 덕양정에 서서 산성에서 왜군과 전쟁을 벌이던 우리 군사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행주산성을 더욱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대첩(大捷): 크게 이김. 또는 큰 승리.

★승전고(勝戰鼓): 싸움에 이겼을 때 울리는 북.

★관군(官軍): 국가에 소속되어 있던 정규 군대.

★승군(僧軍): 승려들로 조직된 군대.

★부녀자(婦女子): 결혼한 여자와 성숙한 여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

★화차(火車): 전쟁 시 불로 적을 공격하는 데 쓰던 수레.

임후남 |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