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200만 한민족, 맨손으로 독립을 외치다

입력 : 2014.02.28 05:49 | 수정 : 2014.02.28 08:52

[3·1운동]

1919년 일제 탄압에 대항한 3·1운동… 종교·민족 운동 지도자·학생 힘 합쳐 총·칼 없이 "대한 독립 만세" 외쳤죠
3·1운동 이후 중국도 5·4운동 일어나
인도 간디도 영국 식민 지배에 맞서 비폭력 무저항 운동에 앞장섰어요

"어른들은 정말 나빠요!"

누나가 무척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말했어요.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소리니?"

엄마께서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나에게 물으셨어요.

"김연아 선수한테 말도 안 되는 점수를 준 심판들 말이에요. 전 세계 사람들이 빤히 지켜보는 앞에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소치 동계올림픽이 끝난 지도 며칠이 지났는데, 누나는 여전히 그 생각만 하면 분이 치밀어 오르는 모양이에요. 아니, 누나만이 아니죠. 저도 그 얘기를 듣자 바로 울컥했으니까요.

"어른들은 정말 이상해요. 우리 아이들보다 더 오래 살고 많이 배웠는데 왜 그래요? 차라리 어린이들이 심판을 봤으면 훨씬 더 공정했을 거예요. 그걸 바로잡지 못한 우리나라 어른들도 미워요."

아빠가 우리를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어요.

"이번 일이 너희에게 큰 교훈을 주었구나. 어른들이 무책임한 건 사회가 잘못되었기 때문이야. 같은 어른으로서 아빠가 부끄럽구나."

그때 누나가 달력을 바라보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화제를 돌렸어요.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서 200만여명의 사람이 독립운동을 일으켰어요.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저력을 널리 알린 거사였지요.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서 200만여명의 사람이 독립운동을 일으켰어요.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저력을 널리 알린 거사였지요. /토픽이미지
"내일이 삼일절이네요. 유관순 언니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건 몇 살 때였어요?"

"글쎄, 아마 20세가 안 되었을 거야."

누나는 엄마의 대답을 들으면서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했어요.

"어머, 정말 20세도 안 됐을 때네. 1902년 11월에 태어나 1920년 9월에 죽음을 맞았으니 만 18세였어요!"

"누나, 그게 정말이야? 그때 어른들은 도대체 뭘 했기에 그렇게 어린 유관순 누나가 옥중에서 죽도록 내버려뒀나요?"

오늘따라 누나와 제가 박자가 잘 맞네요. 운동 경기에서 편파 판정을 하는 것과 한 민족의 독립을 짓밟고 탄압하는 것은 물론 완전히 다른 문제예요. 러시아가 자기 나라 선수에게 금메달을 주려고 심판진을 자기 쪽에 유리하게 구성했다면 욕심이 지나친 것이겠지요. 하지만 일본이 남의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고 어린 여학생의 목숨마저 앗아간 일은 욕심이 지나친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였습니다.

"너희 말이 옳구나. 유관순 열사(烈士)는 앞날이 창창한 학생이었는데 그런 분이 죽임을 당하도록 놔둔 것도 모두 다 어른들 잘못이야. 하지만 우리 조상을 너무 부끄럽게만 생각해서는 안 돼. 3·1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온 세상에 우리 민족의 저력을 널리 알린 거사였으니까."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우리 조상의 독립운동이에요.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만주 등의 지역에서 총을 들고 싸운 독립군이 떠오르지만, 3·1운동은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무려 200만여명이나 들고 일어나 한마음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사건이었어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 모습이에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 모습이에요. /조선일보 DB
"슬프게도 20세기 초에는 인류의 4분의 3 이상이 우리처럼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거나 침략당했단다. 1919년 무렵에는 이런 침략에 저항하는 운동이 전 세계에서 일어났는데, 3·1운동은 그런 역사적 흐름을 앞장서 이끌었지."

아빠 말씀대로 3·1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중국에서는 일본 등 강대국의 침략에 저항하는 5·4운동이 일어나고, 인도에서는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의 식민 지배에 반대하며 이끈 비폭력 무저항 운동이 일어났어요. 2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맨손으로 독립 만세를 외치다니 정말 대단하지요? 3·1운동이 일어날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부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일제의 지배 아래에서 힘겨운 삶을 살았어요. 관공서나 주요 기관은 일본 사람들이 전부 차지했고, 우리나라 사람은 출세는커녕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도 없었지요. 마음대로 회사를 차릴 수도 없었고, 농민은 무거운 소작료에 시달렸습니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 단체와 민족 운동 단체의 지도자들은 일본을 물리치고 독립을 되찾지 않으면 한국은 영원히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학생들과 힘을 합쳐 3·1운동을 준비했단다."

때마침 해외에서도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일들이 생겼어요. 1917년 러시아에서 차르(황제)의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는 혁명이 일어나 우리 같은 약소 민족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1919년 1월에는 미국 대통령이던 윌슨이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했어요.

"해외에서 들려온 이런 소식이 우리 민족에게 용기를 준 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3·1운동이 일어난 건 아니야. 우리 민족은 이미 동학농민운동, 만민공동회 같은 운동을 통해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길러왔거든. 그런 저력이 일본의 탄압에 대항하여 폭발한 거지."

그런데 일제는 유관순처럼 어린 여학생의 목숨을 빼앗으면서까지 정의로운 3·1운동을 탄압했어요. 게다가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 후로 20년 이상 더 우리나라를 지배했답니다.

"김연아 선수는 억울하게 금메달을 놓쳤지만 그래도 우리 국가대표로 출전해 온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렸잖니? 일제의 지배를 받을 때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종목 금메달을 따고도 일본 사람으로 세상에 알려져야 했단다."

우리나라의 3·1운동은 간디가 주도한 인도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우리나라의 3·1운동은 간디가 주도한 인도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위키피디아
아빠의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자유로이 살게 된 것도 3·1운동을 벌이다 희생당한 조상 덕분이라는 걸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어요.

"목숨 걸고 독립을 외친 유관순 언니나 억울한 판정을 당하고도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진정한 우승자로 인정받은 김연아 언니 모두 정말 대단해요. 어른들은 깊이 반성해야 해요!"

누나의 외침에 저도 따라 외쳤어요.

"맞아요. 엄마 아빠도 반성하세요!"

엄마 아빠께서는 '요 녀석들이!' 하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우리는 한바탕 웃으면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했답니다.

강응천 | 세계사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