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알고 싶어요
독립선언은 왜 3월 1일에 했을까
입력 : 2014.02.25 05:34
| 수정 : 2014.02.25 09:10
[3·1 독립선언서]
1월 21일에 사망한 광무황제 국장일이 3월 3일로 정해져
그날과 일요일 피해 1일로 결정… 선언서 낭독 후 만세운동 확대
"오늘날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생략)."
만해(萬海) 한용운이 1919년 3월 1일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행사' 때 말한 내용입니다.
이제 며칠 뒤면 3·1절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에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시위가 전국 방방곡곡에 퍼지기 시작한 날입니다. 3·1절 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많을 거예요. 그중에서 오늘은 독립선언서에 대해 알아볼게요.
선언서의 초안은 역사학자이자 시인인 최남선이 만들었어요. 당시 천도교 대표 손병희 등은 초안을 만들 때 참고하라며 그 취지와 지침을 마련했습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온건하게 할 것과 동양 평화를 위해 조선의 독립이 옳다는 뜻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만해(萬海) 한용운이 1919년 3월 1일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행사' 때 말한 내용입니다.
이제 며칠 뒤면 3·1절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에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시위가 전국 방방곡곡에 퍼지기 시작한 날입니다. 3·1절 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많을 거예요. 그중에서 오늘은 독립선언서에 대해 알아볼게요.
선언서의 초안은 역사학자이자 시인인 최남선이 만들었어요. 당시 천도교 대표 손병희 등은 초안을 만들 때 참고하라며 그 취지와 지침을 마련했습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온건하게 할 것과 동양 평화를 위해 조선의 독립이 옳다는 뜻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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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시작한 지 3주가 지난 2월 10일쯤 초안이 완성됐어요.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언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것인가를 고민했어요.
천도교계 15명, 기독교계 16명과 불교계 2명으로 이루어진 민족대표들은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합니다. 이날은 광무황제(고종)의 장례식과 연관이 있어요.
1919년 1월 21일 새벽 광무황제가 갑자기 사망했어요. 일제가 황제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커다란 슬픔과 분통함을 느꼈어요. 3월 3일로 국장일(國葬日)이 예정되자 민족대표들은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많은 인파가 서울로 몰려드는 상황을 활용하고자 했어요. 다만 국장일에 만세 시위운동을 하는 것은 피하기로 했어요. 3월 2일이 일요일인 관계로 그 전날인 3월 1일을 독립선언 거사일로 결정한 것입니다.
선언서 인쇄는 천도교계 오세창의 책임하에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서울 수송동 보성사에서 맡았어요. 2월 27일 밤부터 2만1000매의 선언서를 인쇄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독립선언서는 일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문체로 되어 있어요.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로 시작하는데요.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는 의미입니다. 선언서 처음에 독립국임을 선언하는 대목에서부터 마지막 공약삼장(公約三章)에 이르기까지 정연한 논리를 전개하며 우리 민족의 독립선언과 독립의 당위성을 당당하게 밝혔답니다.
3·1 독립선언서에서는 강한 민족자존 의식을 드러내고 있어요. 하지만 결코 배타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포용과 공존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조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일본의 잘못을 바로잡고 세계 평화, 인류 행복으로 연결해 찾고 있습니다.
천도교·기독교·불교 및 학생단이 나누어 사전에 선언서를 전국으로 배포했습니다. 드디어 3월 1일이 됐어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을 하고 만세를 삼창했어요. 탑골(파고다)공원에서는 민족대표 33인과 별도로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어요. 이를 계기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서로 나뉘어 시가행진에 나섰습니다. 또 3·1 독립선언서는 전국 각지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확산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유관순 열사의 만세 운동도 이 당시의 일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하다 체포됐어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옥사했습니다. 이번 3·1절에는 유관순 열사의 정신을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