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여행

조선의 건축 역사를 바꾼 거중기… 다산의 발명품이죠

입력 : 2014.02.05 05:52 | 수정 : 2014.02.05 08:54

[68] 다산 정약용 생가

다산 정약용은 유배 중에도 500여권의 책을 썼어요.
다산 정약용은 유배 중에도 500여권의 책을 썼어요. /조선일보 DB
경기도 양평의 양수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입니다. 인근에 있는 운길산 수종사에 올라가면 두 강이 하나로 합쳐지는 장엄한 장면을 한눈에 볼 수 있어요. 10대 시절, 수종사에 자주 올라 한강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키운 사람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최고 학자로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1762~1836)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수원 화성 건설 계획을 세운 사람이지요. 다산(茶山)은 정약용의 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둘러볼 곳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정약용 생가예요.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을 중심으로 위에 다산 묘역이 있고, 아래로 다산기념관, 다산문화관 등의 유적지가 잘 조성됐습니다. 정약용이 만들어 수원 화성을 지을 때 쓴 거중기 모형도 있어요. 이 거중기 덕분에 본래 10년으로 예상했던 수원 화성 건축 기간을 2년 7개월로 대폭 줄일 수 있었지요.

여유당은 야트막한 담이 정겨운 전형적 조선시대 기와집입니다. 집을 통해 사람 성격을 엿볼 수 있다고도 하는데, 여유당에서는 정약용의 청렴하고 소박한 생활을 엿볼 수 있어요. 여유당은 정약용의 당호(★)로, 그 뜻이 아주 깊습니다. "한겨울에 언 냇물을 건너는 것같이 신중하게, 사방의 이웃이 나를 지켜보듯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산다"는 뜻으로, 노자(老子)의 말에서 따왔다고 해요. 정약용은 젊은 시절 정조 임금의 신임을 받아 수원 화성 축조 등 나라의 굵직한 일을 맡았지만, 갑작스러운 정조의 죽음 이후 큰 시련을 겪습니다.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한때 천주교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무려 18년 동안이나 전라남도 강진 등에서 유배(★) 생활을 했거든요.

유배를 떠나고 나서도 정약용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많은 글을 썼습니다. '목민심서'를 비롯한 책을 무려 500여권이나 유배지에서 완성했지요. '목민심서'에는 지방관이 갖춰야 할 덕목과 자세 등이 적혀 있는데, 오늘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보아도 손색없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훗날의 학자들은 '만약 정약용이 유배를 당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학문적 업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답니다. 물론 정약용이 계속 관직에 머물렀다면 또 다른 훌륭한 업적을 쌓았겠지요.

또한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혼자 생활하면서도 늘 고향에 있는 두 아들을 염려했어요. 자신 때문에 폐족(★)이 되었으니, 혹시라도 아들들이 놀림을 받거나 잘못된 생각을 할까 봐 걱정한 거예요. 그래서 두 아들에게 편지를 자주 썼는데, 그 편지에는 자식을 위하는 아버지의 마음과 공부하는 마음가짐,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 등이 담겨 지금 우리에게도 큰 가르침이 됩니다.

여유당은 정약용의 청렴하고 소박한 생활을 그대로 보여줘요.
여유당은 정약용의 청렴하고 소박한 생활을 그대로 보여줘요. /Getty Image 멀티비츠
여유당 옆의 다산문화관에 들어가면 정약용의 일생을 소개하는 영상물을 볼 수 있어요. 다산기념관에는 정약용의 친필 편지와 대표 저서 사본, 4분의 1 크기로 축소 제작한 거중기 모형 등도 전시되어 있어요. 이곳을 돌아보며 거중기의 과학적 원리를 알아보는 것도 아주 흥미롭겠지요?


★호연지기(浩然之氣):
사람의 마음에 차 있는 너르고 크고 올바른 기운.

★실학(實學): 실생활의 유익을 목표로 한 학문.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조선 후기에 나타난 새로운 학문 사상.

★호(號): 본이름이나 자(字) 외에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

★당호(堂號): 집의 이름에서 따온 그 주인의 호.

★유배(流配): 죄인을 먼 시골이나 섬으로 보내어 일정 기간 제한된 곳에서만 살게 하던 것.

★폐족(廢族): 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됨. 또는 그런 족속.

임후남 | 여행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