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여행

여주 '감고당', 명성황후가 왕비 되기 전까지 머물던 집

입력 : 2013.11.27 05:36 | 수정 : 2013.11.27 08:58

[58] 명성황후 생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운명의 여성 인물을 꼽는다면 누구일까요? 외세(外勢)에 목숨을 잃고 시신마저 불에 타고 만 명성황후의 최후는 우리 역사에서 그 어떤 죽음보다 아픈 상처로 남아 있지요. 1895년 을미사변 전후의 명성황후 이야기는 드라마와 뮤지컬 등으로 나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거예요.

지난 11월 17일은 명성황후가 태어난 지 162주년인 날이었어요. 그래서 명성황후 생가에서 그를 기리는 행사가 크게 열렸답니다. 오늘은 경기도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가 볼게요.

명성황후는 이곳에서 8세 때까지 살았답니다. 생가는 전통적인 'ㄱ'자형 한옥으로 그리 크지 않고 아담해요.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명성황후가 공부하던 모습과 마당에서 뛰놀던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생가 앞에는 명성황후가 태어난 옛 마을이라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요. 이 자리가 명성황후의 어린 시절 공부방이 있던 터라고 해요.

명성황후의 순국을 기리는 비석이에요(위 사진). 명성황후가 공부하던 모습과 뛰놀던 장면을 생가에서 상상하며 느낄 수 있지요.
명성황후의 순국을 기리는 비석이에요(위 사진). 명성황후가 공부하던 모습과 뛰놀던 장면을 생가에서 상상하며 느낄 수 있지요.
생가 옆에는 '감고당'이라고 하는 기와집이 한 채 서 있답니다. 생가보다 훨씬 큰 이 집은 인현왕후의 개인 집이었어요. 왜 이곳에 있을까 궁금해서 알아보니 감고당은 명성황후가 생가를 떠나 왕비가 되기 전까지 머물렀던 집이랍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묘가 생가 바로 뒤에 있는데, 민유중은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랍니다. 원래는 궁궐과 가까운 서울 안국동에 있었는데 개발 때문에 서울 쌍문동으로,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어요.

명성황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곳은 생가 입구에 있는 명성황후 기념관이에요. 이곳에는 고종과 명성황후 영정을 비롯한 각종 자료가 전시돼 있어요. 일본 건달들이 휘둘렀던 칼을 떠올리면 그날의 끔찍함을 느낄 수 있어요. 명성황후의 목숨을 빼앗은 그들은 '전깃불과 같이 단숨에 늙은 여우를 베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뻔뻔한 자들이에요. 전시관에선 명성황후가 경복궁 옥호루에서 일본군과 건달들에 의해 살해되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어요. 이것을 보면 일본의 만행에 다시 한 번 몸서리를 치게 된답니다.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이유는 당시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는 친러정책을 폈기 때문이었어요. 우리나라를 지나치게 간섭하던 일본을 밀어내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빌리려 했던 명성황후는 일본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겠지요. 일본은 결국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이후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어요.

명성황후는 목숨까지 바치며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조선 최고의 국모(國母)로 평가받지만, 한편에서는 나라를 망치게 한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어요. 그러나 19세기 말 서양 강대국들이 개방을 요구하는 급변하는 시대에, 명성황후가 자기 이익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고자 고민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거예요. 명성황후 기념관에서 당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세요.

명성황후 기념관을 둘러본 후에는 거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신륵사와 목아박물관도 들러 보세요. 신륵사는 남한강변에 있는 아름다운 절이고, 목아박물관은 전통 목조각과 불교미술 문화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거든요. 가까운 이천 도예마을에서 도자기 체험 활동을 해보는 것도 좋아요.



임후남 |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