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갔어요

지붕에서 내려온 '너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다

입력 : 2013.11.07 06:00 | 수정 : 2013.11.07 08:40

[74] 윤석남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 展

화전민이 기와 대신 사용했던 너와… 얼굴 그려 넣었더니 새 생명 얻었죠
나무의 주름을 그대로 담은 그림들, 지붕 위에서의 긴 세월 잘 표현해요

강원도 깊은 산속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산을 불태워 빈 땅으로 매만지고 나서 그 위에 씨를 뿌려야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화전민(火田民)이라고 부르지요. 평평한 땅이 아닌 산어귀와 산등성이에 농사를 짓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그뿐만 아니라 집을 짓고 지붕 위를 덮어놓을 기와의 재료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어요. 기와를 만들려면 좋은 진흙이 주변에 풍부해야 했으니까요. '너와'는 화전민들이 산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나무로 기와를 대신하여 지붕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요즘 너와집에 사용되는 나무 판을 구경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우선은 50년쯤 되는 소나무를 켜서 만든 널판들을 지붕 삼아 집을 짓는 사람도 없고요. 또 너와집 지붕에 얹어져 5년쯤 비바람을 견뎌낸 널판들은 이미 마르고 젖기를 수차례 반복하는 바람에 나무다운 느낌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거든요. 그래서 일단 지붕에서 내려지면 더 이상 아무런 다른 용도로 쓰일 수가 없답니다.

예술가 윤석남은 그런 널판들을 보고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어요. 한때는 아름드리 멋지고 건강한 소나무였는데 말입니다. 처음에 불그레한 빛깔의 소나무였을 너와들은 비바람 속에서 잿빛으로 변했고, 촉촉했을 속살은 푹푹 파인 채 거친 옹이와 나이테의 윤곽만이 남아 있었어요. 나무 향기도 나지 않고 쩍쩍 갈려 돌처럼 굳어져 버려서 이제는 그 누구도 이것을 보고 소나무라 부를 리 없습니다.

예술가는 그것들을 한참 동안 차근차근 바라보았어요. 그러다가 너와 판자 하나하나에서 소나무가 아닌 각기 다른 얼굴들을 떠올리게 되었지요. 엄마의 얼굴, 아이의 얼굴, 놀란 얼굴, 기쁜 얼굴…. 이렇게 해서 생명을 다한 너와 판자들은 땔감으로 던져지는 대신,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답니다.

(사진 왼쪽부터)작품1. 윤석남, ‘새야 새야 파랑새야’, 2013. 작품2. 윤석남, ‘아이야, 너는 늘 분홍색을 좋아했단다. 나도 너와 같았지’, 2013. 작품3. 윤석남, ‘눈 뜨고 꿈꾸다’, 2013.
(사진 왼쪽부터)작품1. 윤석남, ‘새야 새야 파랑새야’, 2013. 작품2. 윤석남, ‘아이야, 너는 늘 분홍색을 좋아했단다. 나도 너와 같았지’, 2013. 작품3. 윤석남, ‘눈 뜨고 꿈꾸다’, 2013.
작품1을 보세요. 눈을 감고 푸른 하늘을 상상하는 듯, 파란색이 머리 위로 펼쳐진 사람이 보이네요. 나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옹이 무늬를 그대로 살려서 오므린 입술처럼 보이게 했군요. 작가는 나뭇결을 살리면서 그 위에 붓으로 얼굴을 그려 넣었어요. 나무의 고유한 생김새와 인물이 잘 어우러지고 있지요?

작품2에는 분홍색 바탕 위에 엄마와 소녀가 그려져 있네요. 엄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그리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렸나 봅니다. 만일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면, 버려진 널판을 보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할 수 있었을까요? 얼굴이 그려진 이상, 이 나무 판들은 이제 소나무가 아닙니다.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이웃들의 모습이지요.

작가는 얼굴을 그려 넣기 전에 나무에 붙어 있던 흙먼지를 털고 닦아내면서 "너희는 어디에서 왔니?" 하고 물어보았어요. 널판들은 저마다 사연을 들려주었답니다. 그래서인지 윤석남의 인물에는 단순히 사람의 겉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아요. 하나의 생명체가 세상에 태어나 비바람을 겪으며 추위를 버텨낸 이야기도 그 안에 담겨 있고, 또 지난가을에 높디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새가 되고 싶었던 꿈도 깃들어 있지요. 지붕 위에서 생명을 다하고 이렇게 사람의 모습으로 되살아나기까지 널판이 겪은 긴 여행이야기 말이에요.

작품3을 보세요. 약간은 모서리가 부서져 나간 너와 위에 어떤 사람이 연꽃과 더불어, 마치 스스로 연꽃이기라도 한 듯, 연못에서 활짝 피어났네요. 할머니처럼 주름도 많고 파인 곳도 많던 오래된 널판이 생명을 얻어 다시 피어나는 것 같아요. 연꽃에는 귀하게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 담겨 있거든요.

작품4. 윤석남, ‘그린 룸’, 2013.
작품4. 윤석남, ‘그린 룸’, 2013.

작품4는 초록색 방인데, 혹시 초록 자연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닐까요? 벽에는 초록색의 다양한 그림이 붙어 있고, 바닥에는 초록빛으로 반짝거리는 유리구슬이 깔려 있어서, 동화 속 숲의 나라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마저 들어요.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녹색 탁자가 놓여 있는데, 그 위에는 역시 연꽃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답니다. 이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이 언젠가는 다시 귀한 생명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요.

학고재갤러리 (02)720-1524

이주은 |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