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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도자기, 공장처럼 분업해서 만들었대요

입력 : 2013.11.04 23:25 | 수정 : 2013.11.05 08:47
세라믹이라는 말에 흙을 고온에서 구워 만들었다는 뜻이 담겨 있군요. 그래서 흙을 빚어 잿물을 바른 뒤 높은 온도에서 구운 그릇을 세라믹으로 부르기도 하지요.

도자기는 흙을 빚어 만든 그릇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지만 일반적으로는 높은 온도의 불에서 구워낸 도기(陶器)와 자기(瓷器)를 일컫기도 해요. 자기는 섭씨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그릇으로 두드려 보았을 때 금속처럼 맑은 소리가 나요.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 등이 이에 해당하지요. 이에 비해 도기는 자기보다 낮은 온도에서 구운 것으로 강도가 약해요. 두드리면 자기보다 탁한 소리를 내지요. 옹기나 타일을 도기의 예로 꼽을 수 있어요.

지금도 경기도 이천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공장이 몰려 있어요
지금도 경기도 이천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공장이 몰려 있어요. /Getty Images/멀티비츠

조선시대에는 자기를 사기(沙器)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여러 가지 사토(★)를 혼합해서 자기를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다시 말해 자기와 사기를 같은 뜻으로 사용한 것이에요. 따라서 당시에는 사기를 만드는 기술자를 사기장(沙器匠)이라고 불렀어요. 이들은 사옹원(★) 소속으로 사기를 만들었지요.

그렇다면 사옹원에서 일한 사기장은 몇 명쯤 됐을까요? '경국대전'에는 사옹원에 소속된 사기장이 380명이라고 기록돼 있어요. 당시 궁중에서 쓰는 미곡과 포목(★) 등 왕실 재정을 관리했던 관청인 내수사엔 6명만 있었다고 해요. 한편 지방에 소속돼 해당 관청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들어냈던 기술자를 외공장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99명이었다고 기록돼 있지요.

조선 후기에는 사옹원의 분원(★)에만 552명의 사기장이 있었다고 해요. 이렇게 많은 기술자가 있었던 이유는 사옹원에선 자기를 만드는 일이 분업화되었기 때문이에요.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높은 온도에서 견딜 수 있는 흙을 찾아내야 해요. 그 다음에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철분 함량이나 유약(★)의 두께를 정확히 맞춰야 해요. 또 자기를 굽는 가마 안의 온도와 공기의 양도 정밀하게 조절해야 했지요. 이렇게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혼자서 사기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어요. 더군다나 궁궐에선 다양한 종류의 많은 양의 자기가 필요했을 테니 기술자 혼자서 모든 제작 과정을 도맡아하기는 어려웠지요.

그래서 사옹원에는 다양한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모여 있었어요. 물레를 돌려 도자기의 형태를 만드는 장인, 빚어낸 그릇을 마르기 전에 가다듬는 장인, 가마에 굽기 전에 말리는 일을 맡은 장인 등이 그 예랍니다. 이 밖에 도자기를 굽기 위해 가마에 불을 때는 일을 맡은 장인,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전문으로 하던 장인, 도자기에 유약을 입히는 일을 맡은 장인, 가마에서 나온 도자기들을 선별하는 장인 등도 있었고요.

그런데 고려청자나 백자처럼 섭씨 1300도 이상 고온에서 구워 만든 자기는 15세기에는 중국 명나라와 조선, 베트남에서만 생산할 수 있었대요. 특히 조선의 사기장들이 만든 자기는 품질과 예술성이 뛰어나 왕실은 물론 외국 사신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지요. 명나라 사신은 조선에 지나치게 많은 백자를 요구하기도 했지요. 일본이 임진왜란 때 조선의 도자기를 닥치는 대로 빼앗고, 조선의 장인들을 자기 나라로 끌고 간 이유가 짐작이 되지요? 당시 일본이 우리처럼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사토: 잔모래가 섞인 흙.

★사옹원: 조선시대 임금에게 음식을 올리는 일과 궁궐 안에서 음식을 공급하는 일을 맡았던 관청.

★포목: 베와 무명.

★분원: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군 일대에 설치되어 사옹원의 관영 사기를 만들던 곳.

★유약: 도자기의 몸에 덧씌우는 약. 도자기에 액체나 기체가 스며들지 못하게 하며 겉면에 광택이 나게 함.

지호진 | 어린이 역사전문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