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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은 대식가?… 하루에 6번 식사했대요

입력 : 2013.10.08 09:06
조선시대 사람들은 끼니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끼니는 아침, 점심, 저녁처럼 날마다 일정한 때에 먹는 밥을 말해요. 밥을 먹는 일을 뜻하기도 하고요. 끼니라는 말은 1459년에 펴낸 '월인석보'라는 책에 처음 등장했어요. 학자들은 '때(時)'를 뜻하는 말이 나중에 '끼'로 변했고, 여기에 쌀을 의미하는 '니'가 결합해 '끼니'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보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아주 오래전에 끼니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요즘 우리들처럼 끼니를 아침·점심·저녁, 이렇게 하루에 세 번 꼬박 챙겨 먹었을까요?

'초조반·아침수라·낮것상·저녁수라·야참' 또는 '초조반·아침수라·낮것상·참·저녁수라·야참', 이렇게 하루에 5~6번 끼니를 챙겨 먹은 사람이 있어요. 바로 임금님이지요.

'초조반'은 아침 6시에 죽이나 미음(★)을, '아침수라'는 아침 10시에 밥·국·김치·조치(★)·전골 같은 기본 음식 외에 12가지 반찬이 오른 12첩 반상을 말해요. '낮것상'은 점심때인 12시쯤에 면이나 만두, 떡국 등의 음식을 먹는 걸 뜻해요. 그리고 오후 3시쯤에는 '참'으로 다과상을, 저녁 6시쯤엔 다시 12첩 반상으로 '저녁수라'를 들었지요. 그리고 밤 9시쯤에는 '야참'으로 면·식혜·약식 등을 먹어 출출함을 해결했지요. 물론 참이나 야참 등을 빼고 하루에 4번 끼니를 챙긴 임금들도 있어요. 평소 검소했던 영조 임금은 참이나 야참은 물론 낮것상도 줄여서 하루 세 끼만 들었다고 해요.

먹음직스러운 한식으로 차린 밥상이에요(왼쪽 사진). 조선시대 임금의 수라상을 다시 꾸며보았어요(오른쪽 사진).
먹음직스러운 한식으로 차린 밥상이에요. 음식을 낭비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요(왼쪽 사진). 조선시대 임금의 수라상을 다시 꾸며보았어요. 하루에 많게는 여섯 번씩 끼니를 들었다고 해요(오른쪽 사진). /이명원·채승우 기자
조선시대의 일반 백성은 어떠했을까요? 지금처럼 하루에 세 끼를 먹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왕족이나 높은 벼슬에 오른 일부 계층이었지요. 일반 백성은 보통 하루에 두 끼를 먹었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끼니를 '조석(朝夕)', 즉 아침저녁이라고 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라는 책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침저녁에 5홉(현재의 1.5홉)을 먹으니 하루에 한 되를 먹는다'고 기록한 바 있어요. 현재의 홉은 곡식이나 액체 등의 분량을 헤아리는 단위로 약 180mL에 이르는 정도를 말해요.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책에 '대개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 동안은 하루에 세 끼를 먹고, 9월부터 다음 해 정월까지 5개월 동안은 하루 두 끼를 먹는다"고 기록했지요. 해가 긴 여름에는 간단히 먹는 점심을 합해서 세 끼를 먹었고, 겨울에는 두 끼를 먹었음을 알 수 있지요. 간단히 먹는 점심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아침에 먹다 남은 밥 몇 숟가락 정도였다고 해요.

그런가 하면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이 쓴 '성호사설'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나와요. '요즘 사람들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흰죽 먹는 것을 조반이라 하고, 한낮에 배불리 먹는 것을 점심이라 한다. 부유하거나 귀한 집에서는 하루에 일곱 차례 먹는데, 술과 고기가 넉넉하고 진수성찬이 가득하니 하루에 소비하는 것으로 100명을 먹일 수 있다. 옛날 하증(★)처럼 집집마다 사치하니 민생이 어찌 곤궁하지 않겠는가? 매우 탄식할 일이다.' 조선 후기에 돈이 많고 권력 있는 집안 중엔 하루에 무려 일곱 끼를 챙겨 먹으며 낭비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얘기지요. 아마 그들은 지나친 욕심에 몸과 마음이 병들었겠지요?


★미음: 쌀에 물을 넉넉하게 붓고 폭 끓여 체에 받아 낸 걸쭉한 음식. 쌀을 묽게 쑨 죽.

★조치: 국물을 적게 해 진하게 만든 찌개나 찜.

★하증: 중국 진나라 사람으로 사치를 좋아하고 날마다 맛있고 좋은 음식을 차려 먹었다고 함. 수많은 음식을 차려 놓고도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만한 게 없다고 불평했던 인물.
지호진 | 어린이 역사전문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