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옥의 명작 따라잡기

반복그림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라

입력 : 2013.09.02 23:54

인쇄 기법인 '실크스크린' 쓴 앤디 워홀, 대량생산이 가능한 예술작품 선보여
손이 손을 그리는 에스허르의 반복, 그림시작과 끝에 관한 철학적 의미 담았죠

많은 예술가가 반복그림을 그리는 이유… 사람들 기억 속에 오래 남고 싶기 때문

김소월의 시 산유화(山有花)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해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재밌게도 '꽃이 피네'라는 구절이 세 번 씩이나 반복되었네요. 시에서는 의미를 강조하거나 음악적인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반복법이 사용되곤 하죠. 그림에서도 반복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요. 미술에서 반복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미국의 화가 앤디 워홀(War hol)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살펴보도록 해요. 〈작품 1〉 초상화의 모델은 1960~1970년대 전설적인 가수이자 배우로 유명한 엘비스 프레슬리(Presley)예요.

작품 1 - ‘엘비스 1과 2’  사진
작품 1 - ‘엘비스 1과 2’ 앤디 워홀, 1964.
놀랍게도 워홀은 똑같은 모습의 엘비스를 네 번이나 반복해서 그렸어요. 네 엘비스가 복제 인간처럼 똑같아 보이는 것은 포스터나 인쇄물 제작에 사용되는 공판인쇄 기법인 실크스크린(silk screen)으로 제작됐기 때문입니다. 실크스크린은 여러 가지 판화기법 중에서 제작과정이 비교적 간편한 데다 완성된 판에서 수십 장도 찍어낼 수 있어요. 엘비스의 모습을 붓과 물감을 사용해 그리지 않고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했기 때문에 똑같은 엘비스 네 명이 태어나게 된 거죠.

워홀이 반복그림을 개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편리하고 경제적이며 효율적으로 창작하기 위해서였어요. 이는 워홀의 말에서도 드러나고 있어요. "나는 처음에는 그림을 손으로 직접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하는 것이 좀 더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방법은 내가 힘들게 노동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나의 조수 중 누구라도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데 포스터처럼 찍어낸 그림이 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을까요? 절반은 기계적인 인쇄공법을 이용했지만, 나머지 절반은 손으로 직접 그렸거든요. 반복그림의 비결을 설명하자면, 먼저 캔버스에 원하는 색을 칠하고 마르면 그 위에 엘비스의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합니다. 캔버스에 인쇄된 엘비스 모습 여러 개를 물감으로 다시 새롭게 색칠하죠. 즉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인쇄물 제작 방식과 순수예술의 전통적인 창작 방식을 결합해 미술에서는 최초인 반복초상화를 만들어낸 겁니다. 워홀의 혁명적인 아이디어 덕분에 예술작품도 상품처럼 대량생산 방식으로 창작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죠.

작품 2 - ‘손을 그리는 손’ 사진
작품 2 - ‘손을 그리는 손’ 에스허르, 1948.
한편 네덜란드 화가 에스허르(Escher)는 진리를 탐구하는 도구로 반복을 활용했어요. 압정으로 고정한 종이 한 장에 누군가 두 손을 그리고 있네요. 〈작품 2〉 신기하게도 연필을 쥔 오른손은 왼쪽의 와이셔츠 소매를 그리고, 왼손은 오른쪽 와이셔츠 소매를 그리고 있어요. 저런 상태라면 오른손은 영원히 왼손을, 왼손은 영원히 오른손을 그려야겠지요. 그림 속 끝없이 반복되는 두 손은 뫼비우스의 띠를 떠올리게 합니다.

뫼비우스의 띠는 바깥쪽과 안쪽을 구별할 수 없는 신기한 곡면을 말하는데, 이 띠를 처음 발견한 독일의 수학자 아우구스트 뫼비우스의 이름에서 따온 겁니다. 뫼비우스 띠의 한쪽 면에 연필을 대고 면을 따라 선을 그으며 움직이면 출발한 지점과 정반대 면에 도달하고, 계속 움직이면 어느새 처음 자리로 돌아오게 되지요. 뫼비우스 띠의 발견으로 안과 밖이 다르다는 고정관념이 깨지게 된 거죠. 오른손과 왼손이 뫼비우스 띠처럼 끝없이 그리기를 반복하는 이 그림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시작과 끝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같은 것이 아닐까? 참이라고 믿는 것이 거짓이고, 거짓으로 믿는 것이 오히려 참이 아닐까?" 그래서 에스허르의 그림을 가리켜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는 그림'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작품 3 - ‘You are my angel’ 사진
작품 3 - ‘You are my angel’ 이중근, 2008.

한국의 예술가 이중근의 반복그림도 인생의 교훈을 주고 있어요. 파란색과 하얀색 문양이 연속적으로 대칭 반복되고 있는 작품이에요. 〈작품 3〉 그러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마술처럼 숨겨진 또 다른 모양이 나타나요. 〈작품 3 세부〉 날개 달린 귀여운 아기 천사들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모습인데 그 생김새가 모두 똑같아요. 동일한 도형을 반복해 평면이나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는 '테셀레이션(tessellation)' 기법을 응용해 수많은 아기 천사를 태어나게 한 거죠. 테셀레이션의 우리말 표현은 '쪽매 맞춤'이에요. 절의 단청, 궁궐의 담장, 문 창살, 조각보자기와 같은 전통문양이나 욕실의 타일, 보도블록에서도 쪽매 맞춤 장식기법을 발견할 수 있죠. 이 반복그림의 매력은 부분과 전체가 전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에 있어요. 겉으로 드러난 모양과 안에 숨겨진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숨은 그림 찾기 놀이처럼 즐겁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죠. 한편 인생의 교훈도 얻을 수도 있어요. 멀리만 보면 가까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가까이만 보면 멀리 있는 것을 보지 못해요. 인간에게는 망원경적 시각과 현미경적 시각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죠.

심리학을 전공한 경제학자로 유명한 한스 게오르크 호이젤(Hausel) 박사는 특정한 이미지를 반복해 보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학습이 되어 뇌의 기억저장소에 저장된다고 말했어요. 예술가들이 왜 반복그림을 그리는지에 대한 해답을 알려준 셈이죠.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감상자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저장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함께 생각해봐요]

오늘 작품 중 '쪽매 맞춤' 혹은 '테셀레이션' 기법은 건축에서 많이 사용되곤 한답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쪽매 맞춤으로 꾸민 문양이나 장식이 있는지 찾아보고, 마음에 드는 문양이 있다면 따라 그려 보세요.

이명옥·사비나 미술관 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