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손오공이 불 끈 '화염산' 실크로드에 있어요

입력 : 2013.09.04 11:33

인도로 가고 있던 삼장법사와 손오공, 불타고 있는 '화염산'과 마주쳤어요
산을 넘기 위해 마녀인 나찰녀와 싸워 강한 바람 나오는 부채 '파초선' 얻었죠
화염산 불길 잡기 위해 노력한 손오공… 막다른 길 헤쳐나가는 의지 상징해요

산사 체험을 하러 떠나는 날이었어요. 열차를 타고, 기차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탄 다음 절 근처까지 가서도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만 했지요. 차를 타고 갈 수도 있었는데 아빠가 "자연을 만끽하려면 가급적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대중교통을 고집하셨답니다.

"아이 더워! 푹푹 찌는 이런 날에 차를 두고 움직여야 한다니, 이건 정말 너무해."

언덕길을 오르면서 투덜거리자 엄마랑 누나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어요.

"이 정도 더위 가지고 뭘 그래? 화염산을 넘어가던 현장 스님을 생각하며 이겨내야지."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아빠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힘들어하셨어요. 속으로는 후회하고 계시는 게 틀림없어요.

"아빠가 화염산 얘기를 하시니까 이 산이 화염산 같아요!"

중국 실크로드에 있는 화염산 앞에 세워진 삼장법사 일행 동상이에요.
중국 실크로드에 있는 화염산 앞에 세워진 삼장법사 일행 동상이에요. 삼장법사와 저팔계, 사오정이 자리에 앉아 쉬고 있고 손오공이 주위를 살피고 있어요. /토픽이미지
울창한 나무를 뚫고 사정없이 내리쬐는 햇살을 두 손으로 가리며 누나가 절규하듯 말했어요. 중국어로 '훠옌산'이라고 하는 화염산(火焰山)은 실크로드에 있는 긴 산을 말해요. 중국 시안에서 출발해 실크로드로 들어서면 란저우, 둔황을 지나 투루판이라는 분지로 이루어진 도시로 이어진답니다. 동서 길이가 98㎞나 되는 화염산은 이 도시 가까이에 길게 누워 있지요. 햇볕을 받은 모습이 말 그대로 화염에 싸여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대요. 햇살이 직접 내리쬐는 곳은 섭씨 80도에 달해, 계란을 얹으면 바로 익을 정도라고 해요.

"짠! 엄마가 그럴 줄 알고 파초선(芭蕉扇)을 가져왔지."

엄마가 화염산에 갔을 때 기념으로 산 파초 모양의 부채를 가방에서 꺼내 부치셨어요. 실크로드 여행을 갔다 온 지 1년도 넘었는데, 그때 산 부채를 아직도 간직하는 꼼꼼함! 역시 엄마다워요. 현장 스님이 인도에 다녀온 여행담을 주제로 재미있게 풀어낸 소설 '서유기(西遊記)'에는 화염산과 파초선 이야기가 나온답니다. 소설 속 삼장법사 일행은 인도로 가는 길에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화염산과 마주쳤어요. 이 산을 넘어야만 서쪽으로 계속 갈 수 있는데, 불길을 뚫고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요.

"취운산 파초동이라는 동굴에 '나찰녀'가 살고 있다네. 나찰녀가 가진 파초선을 가져다가 화염산에 부채를 부치면 저 불을 끌 수 있어." 삼장법사의 말에 손오공은 나찰녀에게 파초선을 빌리려고 근두운을 타고 파초동으로 날아갔어요. 그러나 알고 보니 나찰녀는 옛날 삼장법사를 잡아먹으려다가 손오공과 싸움을 벌인 '홍해아'라는 요괴의 어머니였답니다.

파초 잎 모양을 한 부채‘파초선’이에요.
파초 잎 모양을 한 부채‘파초선’이에요.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이 못된 원숭이 녀석! 파초선 맛 좀 봐라!"

나찰녀는 아들의 원수인 손오공에게 파초선을 빌려주기는커녕 파초선을 부치며 싸움을 걸어왔어요. 손오공은 파초선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멀리 날아가 나동그라지는 바람에 나찰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답니다. 결국 나찰녀에게서 파초선을 빼앗았지만, 알고 보니 가짜 파초선이었지 뭐예요. 생각 끝에 손오공은 나찰녀의 남편인 우마왕으로 변신해 나찰녀를 속이고 진짜 파초선을 빼앗았어요. 소식을 들은 우마왕이 부랴부랴 달려왔지만, 손오공은 우마왕을 죽이고 나찰녀의 항복을 받아냈어요. 그리고 파초선을 부쳐 화염산의 불을 끄고 무사히 스승을 인도로 모실 수 있었답니다.

"으, 엄마가 나찰녀로 보인다. 파초선을 빼앗아야지!"

엄마한테 뛰어갔지만 내게 돌아온 건 파초선이 아니라 누나의 꿀밤이었어요.

"조금만 더 참아! 네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려."

누나는 핀잔을 주며 엄마한테 넘겨받은 파초선을 기분 좋게 부쳤어요.

"서유기에서는 화염산이 불덩어리로 나오지만, 실제 화염산 안에는 골짜기에 시냇물이 흐르고 숲도 있대. 우리도 조금만 더 가면 시원한 계곡으로 들어설 테니 참고 걷자꾸나."

아빠가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말씀을 계속하셨어요.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막다른 길을 마주치게 되는데, 삼장법사 일행이 화염산 앞에서 길이 막힌 것은 그런 상황을 상징한대요. 손오공이 목숨을 걸고 싸워 파초선을 얻은 것은, 어려움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꾸준히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의 의지를 상징하고요.

"이 세상은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조금씩 변해 가고 살 만해지는 것…, 휴…."

아빠는 힘이 들어 말을 맺지 못하고 헉헉거리셨어요.

"용기도 체력이 뒷받침돼야죠."

엄마 말씀에 우리 남매는 더위를 잊고 깔깔대며 유쾌하게 웃었답니다.


★이기(利器): 실용에 편리한 기계나 기구.
강응천 역사 저술가 |